외국인 감독 없이 한국 축구 살아날까
  • JES 제공 ()
  • 승인 2007.08.0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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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감독 때와 상황 달라…클럽 시스템 정착해야

 
한국 축구계에서 대한축구협회 회장만큼이나 발언권이 센 박지성(26·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최근 혼란스러운 핌 베어벡 축구대표팀 감독 사퇴 국면에서 입을 열었다. “유럽의 선진 시스템이 정착된 것이 아니고 많은 유럽 축구의 경험들이 한국에 접목되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외국인 감독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과 유럽 축구를 경험한 박지성의 지적은 한국 축구의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다. 왜 한국 축구계에 아직 외국인이 대세를 이룰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자.

날로 줄어드는 외국인 감독의 효용성
왜 외국인 감독이 필요한가. 일단 박지성의 발언에 딴죽을 걸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한국 축구는 지난 2001년 거스 히딩크 감독이라는 세계적인 명장을 ‘모셔와’ 유럽식 축구를 발전 모델로 추구했고 그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2002 월드컵 이후 좀더 남아 한국 축구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식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상당한 탄력을 받았을 테지만 그가 사임한 후 한국 대표팀은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지 못했다. 박지성의 표현대로 유럽 축구의 경험이 한국으로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기회는 그때였다.
문제는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천양지차로 변했다는 점이다. 박지성도 지적했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유럽의 선진 시스템, 하지만 그 시스템과 대표팀 감독과는 사실상 큰 관계가 없다.
이제 대표팀은 필요할 때 선수들을 소집할 권한을 잃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국제축구연맹(FIFA)의 대표팀 소집 규정과 상관 없이 대한축구협회에서 형식적인 양해만 구하면 얼마든지 프로구단으로부터 선수를 데려와 훈련시킬 수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사실 이러한 특혜를 가장 잘 활용한 수혜자였다. 특히나 개최국으로서 한국 축구계가 월드컵에 쏟았던 노력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이다.
히딩크 감독의 뒤를 이은 감독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면 한숨을 내쉴 일이다. 이미 한국의 축구 시스템은 선진화를 향해 치닫고 있다. 특히 대표팀 소집 규정에 대해서는 FIFA의 규정을 엄수하는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표팀이 1년에 소집할 수 있는 시간은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대표팀에 유럽의 선진 시스템을 정착하는 노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느 외국인 감독이 부임한들 당장의 성적이 발등의 불일 수밖에 없다.

 
한국 축구의 선진 시스템을 논하자면 학원 축구의 변화, 즉 교육인적자원부까지 포함하는 전체적인 고민이 필요한 실정이다. 감독 한 명만 외국인으로 뽑아서는 될 일이 아니다. 학원 중심의 축구를 클럽 시스템으로 바꿔 선수 한 명 한 명이 재미있게 실력을 쌓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각 지역 주말 리그제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클럽 시스템을 정착해야 한다.
아시안컵에서 졸전을 펼친 대표팀에 비난이 쏟아졌지만 과연 베어벡 감독이 혼자 짊어질 짐인가에 대해 동정론이 적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이기는 축구가 몸에 밴 한국 축구의 토양 속에서 자라온 선수들을 가지고 개인 능력에 기반한 창의적인 작전 구사는 애초부터 쉽지 않았다. 많은 찬스 속에서도 골 가뭄에 허덕였던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과연 베어벡 감독만의 책임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왜 외국인 감독인가
축구만큼 정치적인 스포츠는 없다. 프로스포츠로서 각광받는 스포츠 중 대표팀 경기가 프로리그와 비슷한 인기를 누리는 종목은 축구가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한 스포츠이다. 그만큼 대표팀의 책임감은 보통이 아니다. 그 중 대표팀 감독은 단순히 축구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2002년 월드컵에서 기적 같은 성공을 경험한 한국은 아직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로 이러한 부담감을 견딜 수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국 축구사상 최후의 토종 대표팀 감독이었던 K리그의 허정무 전남 드래곤즈 감독도 이 대목에 동의한다. 국내파 감독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아직은 한국 지도자가 대표팀을 맡을 시기는 아니다. 실력을 떠나 지금과 같은 국민적인 기대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대표팀에 도움이 안 된다”라고 말한다.
허감독의 말처럼 지금으로서는 외국인 감독의 장점이 많다. 아직은 수준 차가 있는 해외 선진 축구의 기술과 전술을 전수받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외국인이라는 신분 자체가 국내의 소소한 논란에 버팀목이 된다. 언론과 팬은 통상적으로 외국인 감독에게 좀더 인내심을 보인다. 이는 대표팀의 지속성 유지를 위해 무척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게다가 외국인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연봉을 받으며 스타로 떠버린 한국 선수들을 다스리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면 어떤 감독을…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대표팀 감독이 선수들을 소집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 선수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만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팀을 완성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리리란 점은 명약관화한 문제다.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현재 적을 두지 않고 있는 세계적인 명장이 많다. 지난해 독일월드컵에서 개최국을 3위로 이끈 위르겐 클린

 
스만 감독부터 시작해 이탈리아를 독일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마르첼로 리피 감독, 지난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우승시킨 파비오 카펠로 감독 등 명장들이 즐비하다. 한국 축구가 5년 전 경험한 히딩크 충격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기회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환경에서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차라리 족집게 스타일의 감독은 어떨까. 세계 축구계에는 위기에 빠진 팀을 단기간에 회복시키는 응급처치형 감독이 적지 않다. 위기의 이라크를 두 달 만에 아시안컵 우승으로 이끈 조르반 비에이라 감독은 가장 상징적인 예로 통한다. 어차피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을 거라면 너무 무리할 필요도 없다.
아직은 외국인 감독이 도움이 되는 한국 축구의 현실이지만 갈수록 그들에게 기대할 부분은 줄어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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