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악몽’ 떨치는 살풀이 한마당
  • 조 철 기자 ()
  • 승인 2007.08.2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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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 / 권력사관에 비춰본 고려의 항전

 

팔만대장경이 지난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합천 해인사는 이를 기념해 8월18일 경내에서 문화 축제를 열었다. 팔만대장경을 주제로 화려한 한복의 미를 뽐낸 ‘김혜순 한복 패션쇼’와 ‘클래식 산사음악회’로 꾸민 이날 행사는 위안과 휴식을 위해 산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축복이었을 것이다. 8백년 전의 ‘악몽’과 싸웠던 팔만대장경도 이날 행사로 고요히 잠들 수 있었을까. 고려 시대 ‘항몽’은 백성들에게 40년 세월 이어진 ‘악몽’이었다. 끝 모를 전쟁의 악몽 중에 팔만대장경 판각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부처의 신통력으로 몽골군을 물리쳐 주기를 간절히 빌었던 불심이 깃든 작업이었다.
최근 나온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은 팔만대장경 탄생의 역사적 배경이었던 몽골과의 40년 전쟁을 사초를 쓰듯 써내려간 역사 소설이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던 그 절절한 몸짓에 비할 수는 없지만 저자가 고려사를 분석해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에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는 데 바친 발품은 빛난다. 주요 일간지에서 국제 관계·남북 문제·군사 문제 대기자로 이름을 날린 저자이기에 ‘이름값’을 하려 애썼음을 책 속에서 문득문득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강화, 특히 강화가 지닌 고려 시대의 역사성에 천착해 우리 역사의 백년대란을 집필해왔다. <무인천하> <세계의 정복자 대 칭기스칸>이 저자의 그런 노력 끝에 나왔고,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 책은 방대한 문헌과 자료를 뒤적인 저자의 땀이 배여 있음은 물론이고, 이전의 저술들에서 얻은 많은 경험이 든든한 지원군으로 작용했다. 그래서인지 책의 성공을 떠나 기자 출신 저술가로서 한 모범적 사례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저자가 항몽전쟁을 다루면서 취한 입장은 권력이 역사를 만든다는 권력사관이다. 권력사관의 관점에서 개인들이 국가 안에서 벌이는 권력 쟁탈과 국제 사회에서의 국가들의 패권 경쟁에 관심을 두었다. 몽골에 대항해 고려 조정과 고려군이 취한 전략과 전술, ‘무인천하’였던 당시 고려의 권력 중심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항몽’의 전개 과정과 결말을 그려냈다.
대륙에서 강대 세력들 사이에 패권쟁탈전이 일어나 기존의 국제 질서가 교란되면, 한반도는 외교적 갈등 끝에 전쟁을 겪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선조들은 ‘사대교린’을 적절히 활용해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살려왔다. 사대교린은 ‘명분’을 세우면서도 ‘실리’를 도모하는 양면 전략으로 우리 역사의 일관된 외교 노선이자 국가와 민족의 생존 전략이었다.

 
싸우면서 공존한 고려의 생존 방식에 천착
고려는 신라의 영토와 국민을 이어받아 국가를 형성했지만 전신인 고구려의 ‘자주’를 추구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북진 정책을 써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 것은 자주 정책의 승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신라의 유산이라 할 사대 정책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서 고려의 이론가와 정책가들 사이에서 명분과 실리는 노선 투쟁과 정책 논쟁의 대상이었다.
몽골이 등장해 아시아 패권에 도전하면서 동아시아의 금을 밀어내고 고려에 침략했을 때, 개경의 정치인들은 강국이 된 몽골을 대국으로 인정하고 사대할 것인가, 야만족과 싸워 명분을 지킬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임금인 고종과 권력자 최우의 반몽항전 노선에 따라 몽골과 싸웠다. 그러나 제1차 전쟁에서 패해 항복한 고려는 금을 배척하고 몽골에 조공했다. 그러나 몽골의 조공 요구와 내정 간섭이 커지자 항몽파들은 다시 자주를 내걸고 수도를 강화로 옮겨, 세계 제국이 된 몽골과 기나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의 결말은 신라의 사대 노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항몽을 고수한 군부 강경파 세력인 삼별초가 조정의 뜻에 반발해 3년간 저항했지만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당하고 말았다.
저자는 “역사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요인에는 경제도 있고, 정신도 있고, 환경도 있다. 그러나 경제와 정신과 환경을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권력이다. 명분이냐 실리냐의 선택도 국가 권력자가 결정할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또 “역사를 발전시키기도 후퇴시키기도 했지만 역사의 변화와 결정은 권력자가 좌지우지했다”라며 자신의 권력사관을 설명한다.
저자는 소설 집필에 앞서 항몽전쟁을 분석하면서 몽골 제국과 싸운 나라들이 승리와 생존을 위해 선택한 대응 방식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투항조공형’으로, 싸우지 않고 몽골의 투항 권고에 따라 항복한 나라들이다. 카를루크와 위구르, 약소국이었던 두 왕국은 국가와 왕위가 보장되고 국민들의 생존권을 온전하게 지켰다. 둘째는 ‘항전멸망형’으로, 투항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하다 패망한 중국의 금과 남송, 중동의 코라슴 등이다. 몽골과 싸워 패한 뒤 나라는 없어지고 임금도 사라졌다. 패망국의 국민들은 노예가 되거나 징용되는 등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셋째는 ‘항전공존형’으로, 강화 정책을 펴면서도 요구가 지나치면 저항도 계속한 나라가 있다. 유일하게 고려가 이에 해당한다. 고려는 몽골과 한창 전쟁 중일 때도 사절을 교환해 협상을 계속하면서 조공도 바쳤다. 임금이 몽골에 국서를 쓸 때도 스스로 신하임을 칭하고 몽골 임금을 상국의 폐하라고 높였다. 그러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했다. 몽골은 6번의 침공으로 40년 동안 전쟁을 치렀지만 고려를 군사적으로 패배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강화 협정을 이끌어내면서 명분도 살리고 실리도 살린 것이다. 국제 권력 경쟁에서 사대의 지혜가 없었던 금나라 등 강자들이 비운을 겪은 것과 대조되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자들의 논쟁과 권력 다툼 외에도 전쟁의 현장 또한 빼놓지 않고 처절한 사투와 함께 그려놓았다. 몽골의 제6차 침입기에 관련한 기록으로 “몽골 군사들은 고려의 남녀 20만6천8백여 명을 잡아가고, 살육된 자는 이루 셀 수가 없다. 그들이 지나간 곳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라는 것을 보면 그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몽골에 저항한 역사에서 오히려 민족의 저력을 느끼게 된다. 백성들이 절망에서 도피하지 않고 힘을 모으는 일은 일상이었다. 인고의 세월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인물들은 후세대에게 지혜와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이 책의 장점은 역사가 단지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장치했다는 것이다.
강화협정을 맺고 몽골군이 철수한 뒤 고려 조정은 하늘과 신령들에게 글을 올렸다. 전란을 당하고 난 뒤 그 참상을 되돌아보고 새로이 결의를 다진 내용으로, 이규보가 쓴 ‘군신맹고문’(君臣盟告文)으로 남아 있다. “무릇 화복(禍福)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 서두만 봐도 임진왜란 등 한반도에 끊이지 않았던 외침을 생각하면 항몽전쟁이 낳은 이 맹세문은 현재까지도 유용한 글이다. 환란을 불러들일지 말지는 그 시대를 사는 나라 모두의 몫임을, 정치인뿐만 아니라 모두가 새기고 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 책 세 권을 들고 집과 사무실을 오갔더니 팔이 저렸다. 책 무게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무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군의 고려 침공 약사

■제1차 침공(1231): 살리타이의 지휘 아래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강화를 맺고 화해했다. 몽골은 다루가치를 두어 고려를 관리하게 하고 철수했다.
■제2차 침공(1232):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자, 몽골에 대한 배신이라고 규탄하면서 침범했다. 조정이 있는 강화도를 공격하지는 못했지만 한반도의 북부와 중부를 유린했다. 살리타이가 처인성(용인)에서 김윤후 군에 피살되자 철수했다.
■제3차 침공(1235~1239): 몽골은 동진국, 금나라, 코라슴 등 3국을 멸망시킨 이듬해 탕구의 지휘 아래 경주까지 진격하여, 초조대장경과 속대장경 및 황룡사 9층탑을 불태웠다.
■제4차 침공(1247): 고려가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을 계속하자 아무칸의 지휘 아래 다시 고려에 침공했다. 몽골 왕족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어 고려 침공이 지연됐다.
■제5차 침공(1253~1254): 야쿠가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의 반역자 홍복원과 함께 침공했다. 그러나 충주에서 다시 김윤후에게 패배하여 철수했다.
■제6차 침공(1254~1259): 자랄타이가 침공하여 전국을 유린했으나, 고려는 항복을 거부하고 외교교섭으로 임했다. 몽골은 출륙환도와 국왕입조를 항복조건으로 제시했으나, 고려는 임금 대신 태자가 몽골에 가는 것으로 대체했다. 1273년 삼별초가 붕괴됨으로써 고려에는 ‘조공 하의 평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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