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빼앗아간 내 돈 돌려달라”
  • 왕성상 전문기자 ()
  • 승인 2007.08.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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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 산 금융 증서 환불 요구 ‘봇물’…정부 “1975년에 이미 보상”

 

지난 8월21일 오후 서울 적선동 광화문플래티넘빌딩 6층 ‘일제 강점 하 민간 피해 재산 보상 청구 위원회’ 연락 사무실. 77세인 김기전 의장을 비롯한 대책위원회 임원들이 국회 방문 일정을 짜고 있었다. 다음날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를 찾아가 법안 소위원회에 넘어가 있는 ‘일제 강점 하 민간 재산 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안’ 심의에 따른 이해와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위원회 구성원 대부분이 고령이지만 올가을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온힘을 다해 뛰는 모습이다. 법안이 재경위 소위를 거치기만 하면 법제사법위원회와 국회 본회의 통과는 무난할 것으로 보고 금융 자산 찾기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법안은 지난해 5월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 등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발의해 재경위에 계류 중이다. 법안에 대해 상임위 의원들이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국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태평양유족회의 인적 보상과 관련된 법률안이 만들어져 해당자에게 혜택이 돌아간 전례를 들고 있다.
이들은 왜 단체를 만들고 법안 통과를 학수고대하는 것일까. 8·15 광복을 맞은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일본에게 빼앗긴 금융 자산을 꼭 되찾고 세상을 떠나겠다는 일념에서이다. 게다가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과를 받아낸다는 차원에서도 자산 찾기에 집착하고 있다. 김의장은 “국가가 앞장서 국민들의 개인 재산 청구권을 포기한 것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국민 보호 의무를 지고 있는 정부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으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대목도 보상 청구 근거로 삼고 있다.
노대통령은 2005년 3·1절 기념식과 올해 6월6일 현충일 행사장에서 “국가가 개인 청구권을 일방으로 처분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일 협정과 피해자 보상 문제에 우리 정부의 부족함이 있었다면 정부가 해결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에 국민들이 빼앗긴 금융 자산 보상을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노대통령, 정부가 해결해야 할 것
위원회가 만들어진 것도 노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던 그 무렵이다. 정보 교류를 위해 만남을 가져왔던 일제 금융 자산 수탈 피해자들이 조직을 결성해 정부에 피해 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발길을 돌린 피해자들은 때마침 보험 고객 입장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벌이고 있던 사단법인 보험소비자연맹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에 연맹은 실상 파악과 더불어 피해자 접수를 시작했다. 인터넷, 직접 방문, 서면, 전화 등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위원회 연락처도 연맹 사무실 한 쪽을 이용하면서 회원들이 점차 불어났다.
현재 가입된 회원 수는 2천5백여 명. 대부분 일제 때의 보험 증서를 가진 사람들로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소수이지만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있다. 60~70대가 대부분이고 나이가 들어 직장을 그만두었거나 일손을 놓은 자영업자, 농민, 가정주부가 주를 이룬다.
이들 회원은 정부로부터 받아낼 일본 수탈 금융 자산 규모를 1천억원대로 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1엔(또는 1원)은 지금 우리 돈 10만원 꼴이다. 한국은행 경제 지표와 물가 상승률이 반영된 것이다. 이 금액은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전체 금융 자산 증서 중 0.01%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 장에 한 장 정도 남아 있다는 얘기이다. 증서 대부분이 한국전쟁 때 불탔거나 사회 격변기와 이사 과정에서 없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융 자산 증서는 매우 다양하다. 일본이 발행한 은행권, 보험 증서, 금융증권(농협 발행), 국채, 지방채, 저축권, 군표, 주권, 사채, 유가 증권, 해외 송금 증서, 기탁금 증서 등 수십 가지이다. 일제 강점 시절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발행된 증서들로 전체 금액이 적지 않다. 증서 액면가는 50전(5천원)~1만원(1억원)까지 다양하다.
우리 국민들이 강제로 들어야 했던 보험만 해도 그 때 돈으로 5억 엔(58조원)에 이른다. 일본 정부는 벼 공출(정부에 강제로 내는 것) 대금을 채권으로 주었고, 많은 부분은 보험 증서로 대체시켰다. 계약 건수 역시 엄청나 한반도 인구 수(2천5백91만여 명)의 47%(1천2백23만여 명)에 이른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조선총독부 간이 보험이 좋은 사례이다. 지금도 지방의 웬만한 가정이나 사무실에 소중하게 보관되어온 일제 강점기의 빛바랜 금융 증서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했다.
위원회 대변인 격인 박숙혜 홍보이사는 “일본은 전쟁이 끝난 뒤 증서 소지자에게 단 한 푼의 돈도 주지 않았다. 식량과 돈이 없어 채권과 보험 증서만 쥐고 굶주리다 숨진 피해자들이 수만 명을 헤아린다”라고 말했다. 그는 “장사를 하거나 징용, 보국대,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채권을 사야만 했으나 해방 뒤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라고 회고했다.
대책위원회는 이와 함께 1965년 한·일 경제협정 때의 대일 민간 청구권 포기 문제도 따지고 있다. 정부가 보상금 수령 과정에서 수탈 금융 자산을 거론하지 않겠다며 민간 청구권을 포기한 점에 대해서도 대리 보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잘못해 민간인들이 피해를 본 부분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청구권 포기에 대한 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1975년 법을 만들어 일부 사람에게만 보상을 해주었으나 시끄러웠다. 보상이 형식적이어서 면피성이라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또 해당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 대부분 보상 사실을 몰랐고 지급된 금액마저도 적었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다. 사정상 늦게 등록해 ‘2차 지급 약속’을 받았던 사람들은 더욱 황당해하고 있다. 1982년 보상법이 없어지면서 하루아침에 보상받을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일관성 없는 정부 조처를 성토하며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입장이다.
1982년에 보상법 사라져 구제 막막
그런 일이 있고부터 개인적으로 소송 제기나 탄원서 제출, 정부 기관 방문, 언론사 제보 등을 통한 실상 알리기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일제 보험 피해자 최규명씨.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가기 위해 짐을 쌌던 그는 우연히 일본 오사카 생명보험회사 발행 보험 증서를 발견했다. 세상을 떠난 부친이 자신 앞으로 보험(1천 엔)을 들어놓은 증표였다. 최씨는 이를 근거로 1999~2001년 일본 법원에 소송을 냈으나 졌다. 이어 일본 최고 재판소 상고까지도 기각당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를 계기로 대책위원회에 본격 뛰어들어 일본 수탈 금융 자산 찾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공청회 증언자로 나가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정부의 빠른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위원회 구성, 법 제정 추진을 비롯한 일련의 움직임들도 그런 흐름과 이어져 있다. 2005년 6월과 2006년 6월 공청회가 열렸고 국회 의원회관 1층에서 ‘일제 금융 수탈 자료 전시회’도 마련되었다. 한·일 합방 이듬해인 1911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발행한 각종 금융 자료들이 선보여 눈길을 모았다.
위원회 업무를 측면 지원하고 있는 유비룡 보험소비자연맹 회장은 “외국 사례로 볼 때 일본의 수탈 금융 자산은 어떤 일이 있어도 되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이 발행한 금융 자산 증서에 대해 모두 보상 받은 타이완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보험 계약자와 우편 저금 가입자의 경우 1백20배를 보상받은 것이다. 미국, 오스트리아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1975년에 보상을 해주었는데 무슨 소리냐. 그 때 충분히 알려 보상을 받도록 했다. 시기를 놓쳐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은 당사자 책임이다”라고 밝혔다. 끝까지 보상금을 받아내겠다는 위원회와 발뺌하는 정부의 줄다리기가 예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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