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있다고 ‘실연’까지 있으랴
  • 김행 편집위원 ()
  • 승인 2007.09.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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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패배 후 골수 지지자들 ‘박근혜 사랑’ 더 깊어져…이명박 후보에게는 큰 부담

 
지난 8월 27일 오후 4시 평창동의 중국집 하림각에서 열린 박근혜 후보 중앙선대위 해단식. 애초 80명 정도를 초대했으나 2천여 명의 지지자들이 점심 때부터 몰려들어 일찌감치 진을 쳤다. 2층만을 빌렸던 주최측은 부랴부랴 식당 전체를 빌려야만 했다. 초대장 하나 없었던 모임이었다. 열성 지지자들이 서로 참석을 독려하는 문자메시지를 사통팔달로 돌리는 바람에 모임이 커졌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의 패배에 격분해 삭발을 한 지지자들도 눈에 띄었다.
오후 5시께 박 전 대표가 도착하자 지지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지자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 전대표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대단하네요?” 했더니 마침 옆에 있던 이연석 전 의원은 “아슬아슬하게 패하니까 로열티가 더 강해진 것 같아요. 대부분 박 전 대표가 ‘이번에’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판에서 5년 후를 어떻게 기약합니까?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최대 라이벌인 박 전 대표부터 제거할 걸요? 뭉친 김에 흩어지지 말고 연말까지 가보는 거죠”라고 답했다. 지지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박근혜 대통령 이겼다”를 번갈아 외쳤다. 해단식이 아닌 또 다른 대선 출정식 같았다. 같은 날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측이 자축연을 연 것에도 “예의 없다”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도대체 경선에서 패한 뒤에도 지지자들을 똘똘 뭉치게 한 ‘박근혜의 카리스마’는 무엇일까? 지난 8월20일 서울 잠실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 양측의 대변인에 따르면 박후보는 ‘승리’, 이후보는 ‘패배’라는 말을 듣고 단상에 올라섰다고 한다. 그런데 승패가 엇갈렸다. 불과 2천4백52표 차로 이후보가 이기고 박후보가 패한 것이다. 양측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남을 이후보의 후보 수락 연설이 빛을 바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 반면 ‘패배’ 소식을 귀엣말로 전해들은 박후보는 즉각 연설 문안을 작성해 또박또박한 말투로 한치의 흔들림 없이 ‘깨끗한 승복’을 선언했다. 이후보측 지지자까지 감동했다고 한다. 박후보와는 DNA가 다르다는 평을 듣는 원희룡 후보가 울었을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박근혜의 카리스마이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격 소식을 듣고 최초로 했다는 말 “휴전선은요?”와 지난해 5·31 지방선거 유세 과정의 테러 때 보여준 위기 관리 능력은 모두 박근혜를 ‘강한 지도자’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장면 해단식’에서 “끝까지 함께” 소리 높여
승자인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처음으로 한나라당에 입성했을 당시 동행했던 이후보측 인사는 “한나라당에 마치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장막 뒤로 복면을 하고 칼을 들고 서 있는 자객들이 우글우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라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박근혜당’인 한나라당을 ‘이명박당’으로 바꾸기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위기감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직접선거인 대의원, 당원, 국민선거인단에서는 박 전 대표에게 패했으니 피아를 구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보는 당내에서 ‘철저한 비주류’이다. 당 입성 첫 일성으로 호기 있게 ‘개혁’을 외쳤으나 곧 강한 거부감에 부딪쳐 ‘화합’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박근혜측 인사들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갑다. 후보 당선 직후 60%까지 치솟았던 지지율도 1주일 만에 8%~10%가 빠져 50% 초반대로 떨어졌다. 반면 범여권 대선 주자들의 경선은 진통을 겪으면서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9월 정기국회를 ‘이명박 검증 국감’으로 하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보면 온통 ‘박근혜 칭찬’ ‘이명박 비판’이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를 판이다. 인터넷에서 이명박 후보의 별칭은 ‘땅박이’이다. ‘경선 승자’가 아닌 ‘대선 승자’가 되어야만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후보가 오히려 초조해진 것이다.
‘자장면 해단식’에서 안병훈 본부장은 “우리 끝까지 흩어지지 말고 뭉치자”라고 외쳤다. 서청원 상임고문은 “이후보의 승리는 인정하지만, 그 사람 도덕성까지 전부 안고 갈 이유는 없다. 도덕성 문제는 이후보 본인과 그들이 앞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절규했다. 지지자들은 열광했다. 기자석에서 한 기자가 “여기는 종교 집단 같다”라며 “‘박빠’의 실체가 뭐냐?”라고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뭉치게 하는가? 우선 조직을 보자. 골수 지지층의 주류에는 ‘평생 동지’인 옛 민정당 출신들이 상당히 많다. 현 한나라당의 본류는 민정당이고, 박 전 대표는 2년3개월 동안 당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오너십이 있는 정치인이었던 까닭에 민정당 출신들이 상당수 자발적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뛰었다. 5공화국 초 조직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평생 동지’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청 조직에 빗댈 만큼 충성심이 강한 정치 조직이다.
박근혜 골수 지지층들은 또 대단히 보수적이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다. 자장면 해단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기자석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당장 지지자들 사이에 호통이 쏟아졌다. 해당 기자 두 명은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 ‘애국 처녀 박근혜’라고 믿는 확신범들이다.

 
게다가 박후보는 ‘도덕적’이고 이후보는 ‘부도덕 종합 세트’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이후보 낙마설’ ‘옥중 출마설’ ‘본선 필패설’을 걱정한다. 그들의 주장에 수긍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이 끝난 지 1주일 뒤쯤 검찰은 박 전 대표의 정수장학회 공금 횡령 등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무혐의’이다. 이명박 후보 캠프 핵심 인물이 당원을 꼬드겨 박 전 대표의 비난 회견을 주선하고, 기자회견문까지 제공해 폭로한 그 의혹이 ‘무혐의’로 처리된 것이다. 반면 이후보는 여전히 ‘의혹’의 중심에 서 있다. 도곡동 차명 재산 의혹은 박근혜 골수 지지층에게는 논란거리이다.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가 이후보이고 매각 과정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의 작용이 있었다는 설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BBK 의혹과 관련해 결정적인 순간 김경준씨가 귀국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그럴듯하게 유포되어 있다. 박 전 대표측 현경대·최병렬 고문등은 “여권이 11월25일~26일 공식 대선 후보 등록 직전까지는 이후보의 팔·다리만 분질러놓고, 등록 직후엔 이후보의 심장을 쏠 것”이라며 “10년을 염원한 정권 교체의 꿈이 물 건너갔다”라고 한탄했다. 오죽했으면 이후보 진영의 좌장인 이재오 최고위원이 ‘박 전 대표의 반성’을 요구하면서 “박 전 대표 측근이 이후보의 ‘낙마’ 가능성을 제기했다”라고 강하게 반발했을까. 이최고위원은 대구 출신 중진 의원을 지목했지만 그만이 아니다. 박 전 대표 진영에 가담했던 의원들을 포함해 대다수 골수 지지자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며 “박 전 대표에게 한번 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대선 후 박근혜당 따로 만들자” 주장도
결국 이후보측에서 말이 나오고 말았다. 강경파들 사이에서 ‘차제에 박후보측을 털고 차라리 외연을 확대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이후보의 자축연에서 참석자들은 “이대로”를 외쳤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이후보 캠프 사람들끼리만’이라는 언중유골이 있다. 경선 이후 독립 투쟁하듯 점점 더 뭉치는 박근혜 지지층이 골치 아픈 것이다. 이런 이후보 캠프측의 기류를 읽었는지, 박 전 대표의 ‘흑기사’를 자처한 곽성문 의원은 이후보 측근들에게 “지금 대구에서는 (박 전 대표가 경선에서 지는 바람에) 조순형이나 손학규를 찍자는 여론도 있다”라며 당장 협박하고 나섰다.

 
선택은 이명박 후보 자신이 직접 할 수밖에 없다. 대선 승리에 자신이 있으면 자기들끼리 갈 것이고, 자신이 없으면 박 전 대표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자발적으로든, 떠밀려서든.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진정성이 담기기는 힘들다. 적어도 박 전 대표측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다. 따라서 자장면 해단식에서는 “대통령 선거 직후 따로 박근혜 당을 만들자”라는 말들도 나왔다. 이후보의 당락과 상관없이 2008년 4월 총선을 대비하자는 것이다. “이번 경선에서 영남의 표심을 확인한 이상, 잘하면 원내 제 1당도 가능하다”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서청원 상임고문이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할 수 있느냐. 대한민국 위대한 지도자를 도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계속 똘똘 뭉쳐 나가자”라고 소리친 것을 ‘2008년 총선용’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해단식 다음날인 28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서고문의 주최로 수도권 선대위 해단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박근혜 골수 지지자들의 취중 진심이 물항아리 깨지듯 쏟아져 나왔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일부 술자리가 겹쳐서 참석자들이 격앙된 탓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이후보에게 ‘무조건 탕평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웃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범여권 진영이다. 박 전 대표 해단식이 있던 날. 분위기를 소상히 전해들은 염홍철 전 대전시장은 “이해찬 후보를 돕고 있다”라며 “여권 승리는 범여권이 잘해서가 아니라 한나라당이 쪼개져서 가능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후보가 ‘범여권 검증’으로 지지율이 휘청거리면 박후보 쪽에서 ‘후보 교체론’을 들고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분열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어차피 49 대 51 싸움 아니냐”라며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후보는 앞으로 지지율이 떨어질 일만 남지 않았느냐”라는 것이다. 점점 더 뭉쳐가는 박근혜 골수 지지자들을 두고 시간만 끈다면 이후보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장고 후 이명박 후보가 내놓을 카드는 무엇일까? 이제부터는 정치인 이명박이 시험대에 오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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