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망령 되살아오는가
  • 조홍래 (언론인·전 연합뉴스 외신국장) ()
  • 승인 2007.09.0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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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러시아 패권 싸움 다시 불붙어…혼자서 웃는 중국이 변수

 
새로운 냉전의 그림자가 보인다. 러시아와 미국은 점점 적대적이 되고 유럽은 에너지 공급을 무기로 삼는 모스크바의 횡포에 불안을 느낀다. 러시아인들은 그들대로 언론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는 푸틴 대통령 체제에서 냉전의 악몽을 떠올린다.
미국인들은 러시아의 적대적 태도가 긴장을 만든다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푸틴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미국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고 반박한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이 우즈베키스탄의 ‘오렌지 혁명’ 같은 색깔 혁명을 일으키려는 반러시아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재래식 무기 조약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폴란드와 체코에 건설하려는 미사일 방어망에 대한 반발이다. 미국은 잠재적 위협에 따른 대응이라고 말하지만 러시아가 볼 때는 설득력이 없다. 미국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민주주의 제도와 미국식 자본주의 도입을 제의했으나 러시아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향후 진로에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지난 2월 브뤼셀에서 발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2차 대전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인식이다. 러시아의 장래에 문제가 있다는 데는 미국인과 러시아인의 생각이 같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 러시아는 미국의 약탈적 자본주의가 대량 실업 사태를 촉발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권위주의로의 회귀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다수의 러시아인들은 푸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긍정적으로 본다. 질서를 회복하고 경제 정의를 회복함으로써 러시아의 자존심을 살려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 덕택에  정의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대신 적대주의가 묻어왔다. 지정학적 균형이 바뀌면서 미국이 약자로 변했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적대주의에 의존한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시각이다.
모스크바 대학의 국제문제 및 외교정책 대학원장 세르게이 카라가노프는 지난 7월 초에 발표한 논문에서 러시아, 미국, 유럽이 위험한 ‘새 전환기’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1990년대 이후 미국과 자본주의가 세계를 독식했던 시대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는 서방의 ‘신 제국주의’에 일단 저항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민주주의의 십자로에 서게 되었으며 서방은 이를 권위주의로 매도했다.
구미 국가들은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 옛 소련 시절에는 러시아 국민들이 독재적 지도자들의 희생물이었으나 지금은 자발적으로 푸틴의 통치를 추종하고 있는 만큼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권위주의는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저지되었다. 폴란드는 유럽연합(EU)과의 WTO 가입 협상을 중단했다. 러시아는 처음부터 서구 세계의 조건에 맞춘 서구 국가들과의 통합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할 경우 러시아는 약세에 몰린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러시아는 여전히 약자로 비쳐진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약화된 쪽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다. 이라크 전쟁 실패, 외교 정책의 무능화, 군사력 약화 등으로 미국은 냉전 때보다 약해졌다. 한때 강대했던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치명상을 입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보다 이라크 전쟁으로 더 심한 상처를 받았다.

러시아의 위상, 갈수록 높아져

 
바로 이 기간에 러시아의 힘은 커졌다. 소련 붕괴 이후 구미 회사들과 맺은 이른바 ‘식민지 적’ 계약들은 폐기되었다. 러시아는 지금 자신들의 입맛대로 유럽과 계약을 할 수 있는 위상을 회복했다. 러시아의 에너지가 필요하면 유럽의 유통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EU는 그러나 이를 거절했다. 이렇게 되면 유럽은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새 에너지 자원을 개발하고 통제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 기업들은 더 이상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다. 유럽과 북미 이외 지역의 국영 회사들이 서구 기업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이들은 대부분 미국에 적대적이다. 세상은 급변한다. 지금은 에너지 개발을 러시아가 선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분석은 상당 부분 현실을 반영하지만 과장된 면도 있다. 다만 러시아 지도층이 국제정세를 다른 차원에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 점에서 고려할 가치는 있다.
지금 미국이 신생 러시아를 흔들고 포위하고 위협하는 것을 보면 냉전으로 복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러시아가 추구하는 것은 1960년대 프랑스의 ‘드골형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성숙한 산업 국가가 되는 것이다. 민주 제도는 선진국으로 가면서 서서히 확립하면 된다. 물론 러시아의 전통과 가치는 버리지 않는다. 결코 서구의 적대국이 되지도 않는다. 러시아는 현 시점에서 강대국은 아니다. ‘현대화된 강국’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누구를 공격할 의도는 없으나 국익과 나라의 자존은 지킬 결의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를 뒤흔들거나 적대적 동맹을 형성하면 거기에 저항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미국은 냉전 식으로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보다는 대화를 해야 한다. 냉전으로 복귀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푸틴은 미국을 ‘신 나치’라고 불렀다. 미국이 유일 강대국의 지위를 이용해 세계를 멋대로 재단한다고도 했다. 부시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러시아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격이다. 36년 전 닉슨과 마오쩌뚱(毛澤東)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국과 중국은 위협을 주는 세력이 상대가 아니라 소련이라는 점을 알았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푸틴이 닉슨의 교훈을 배울 차례이다. 러시아에 대한 위협은 서방이 아니라 동방, 즉 중국에서 온다는 사실을 푸틴은 망각하고 있다.
중국이 당장은 러시아의 파트너로 보이지만 언젠가는 러시아의 자원과 영토를 넘보는 세력으로 둔갑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물 부족에 시달리는 중국은 국경 너머 러시아의 물 자원에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다. 푸틴의 지금 태도는 스탈린의 암흑 시대를 망각한 모습이다. 닉슨이 예언한 것처럼 세계는 냉전 때보다 더 불안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냉전은 동서 대결을 가져왔으나 피를 부르지는 않았다. 테러와의 전쟁은 도처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킨다. 두 전쟁을 비교하자면 테러와의 전쟁이 더 참혹하다. 이 혼돈의 질서에 대한 처방은 많으나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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