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세우고 공 빼앗긴 비운의 영웅
  •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풋볼위클리> 편집장) ()
  • 승인 2007.10.0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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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우승시킨 첼시의 주제 무리뉴 사퇴 뒷얘기

 

주제 무리뉴가 첼시 축구 클럽을 떠났다. 많은 이들은 무리뉴와 첼시가 결별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정확한 시점이 궁금했을 뿐이다. 크지 않은 클럽(FC 포르투)을 이끌고서 유럽을 제패했으며, 반세기 만에 첼시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안겨주었고, 라이벌의 아픈 곳을 찌르는 독설가이자 아르마니 코트를 즐겨 입었던 이 미남 감독은 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클럽을 떠나게 되었을까?
한 러시아 저널에 따르면 2007년 1월 기준, 그의 재산은 2백10억 달러(한화 약 19조3천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2007년 3월8일자 <포브스>는 이 사나이를 세계 부자 순위 16위에 랭크시켰다. 평범한 옷차림에 무표정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내려다보는 그는 추운 나라에서 온 ‘올리가키(Oligarchs, 러시아 신흥 재벌)’이다. 주제 무리뉴가 아니라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6월부터 구단주와의 관계에 ‘균열’
2003년 6월 말, 만 36세의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스탬포드 브리지(첼시 홈)에 도착했다. 그는 삽시간에 첼시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그가 도착한 순간부터 첼시는 9천만 파운드(약 1천6백7십억원)가 넘는 부채에 신

 
음하는 클럽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게 거금을 쓰는 클럽으로 변모했다.
부채로 인한 경영 압박을 제외한다면 이전에도 첼시는 최악의 클럽은 아니었다. 우수한 멤버를 갖추고 있었고 UEFA컵 진출은 기본이요, 언제나 목표는 챔피언스리그였다. 다만 전성기를 넘어선 올드 스타들의 영입이 ‘가격 대비 효용’ 면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지안프랑코 졸라를 제외한) 다국적 선수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렇다면 첼시는 최악은 아니지만 ‘매우 나쁜 요소들’이 내재된 클럽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아브라모비치의 개혁은 첼시의 선수 영입 패턴을 일순간에 바꿔버렸다. 이제 첼시는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히는 선수들, 다른 클럽의 핵심 선수들을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자국 선수들인 존 테리와 프랭크 람파드의 실력도 상승일로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아브라모비치의 첫 시즌은 무한대의 자금력이 곧바로 우승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감독이었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아브라모비치는 첼시의 화려함에 걸맞은 감독을 원했다. 점찍었던 후보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 에릭손이었으나 그는 자리를 옮길 처지가 아니었다. 다음의 선택지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포르투의 젊은 감독이었다. 스타성, 전술적 역량, 성공에의 경험…. 그 감독이 지닌 긍정적 요소들은 일견 ‘떠오르는 슈퍼 클럽’ 첼시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적 결말을 내포하고 있는 선택이었다. 첫 인상 그대로 로만과 주제는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젊은 나이,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수완, 도전적 마인드 등등 그들이 어울리는 접점은 여러 군데였다. 주제를 앞세운 첼시의 2004·2005시즌은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좌절’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실로 완벽했다. 반세기 만의 감격적인 프리미어리그 우승. 그것은 로만의 천문학적 투자가 마침내 거대한 트로피로 바뀌기 시작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주제와 로만의 밀월은 어쩌면 거기까지였다.
2005년 6월, 둘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브라모비치가 토트넘의 기술이사 프랑크 아르네슨을 영입해 선수 스카우트와 유스팀 육성을 담당하게끔 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감독 무리뉴에게 선수단 구성의 전권을 일임하지 않겠다는 구단주의 의지 표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것은 선수단 운용에 구단주 자신이 직접 개입하고 싶다는 적극적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무리뉴는 첼시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 아르네슨과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으며, 그것은 사실상 무리뉴와 아브라모비치 간의 투쟁이었다. 누가 클럽의 진정한 ‘넘버 원’인가? 5억 파운드(약 9천3백억원)를 쏟아부은 구단주인가? 아니면 팬들이 연호하는 영웅 감독인가?

떠나기 직전까지 반목 이어져
아르네슨의 등장은 상징적 시작에 불과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친구들’ - 특별히 러시아·이스라엘·네덜란드 계통의 인물들 - 을 점점 더 많이 클럽 일에 개입시켰다. 급기야 2006년 5월, 이번에는 아브라모비치

 
가 오래도록 흠모해온 특별한 친구 한 사람이 첼시 클럽에 도착했다. 그는 아르네슨과 같은 클럽의 간부가 아니었다. 바로 우크라이나의 축구 영웅 안드레이 셰브첸코가 그 주인공이었다.
무리뉴는 (정점에서 내려올 것이 어느 정도 예상된) 이 ‘빅 네임’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는 셰브첸코에게 투입될 이적료 - 3천만 파운드(약 5백57억원) - 를 다른 곳에 사용하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아브라모비치는 셰브첸코의 아름다운 축구가 첼시를 빛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무리뉴가 난관에 봉착해 있을 때, 이에 대한 아브라모비치의 대답은 “셰브첸코를 잘 활용해 봐”였다.
3년여의 재임 기간 동안 무리뉴의 축구가 무결점의 평판을 얻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지나치게 견고함을 추구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계산적이었다. 첼시의 견고함은 결정적 순간 바르셀로나의 ‘번뜩이는 재능’ 앞에 빛을 잃기도 했다. 또한 무리뉴의 계산력은 결정적 순간 라파엘 베니테스(리버풀 감독)의 ‘감각이 가미된 계산’ 앞에 무릎을 꿇기도 했다. 투자된 돈의 규모, 선수들의 이름값에 비해 무리뉴의 첼시는 ‘지루함’의 대명사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5억 파운드를 쏟아부은 구단주, 그리고 ‘호나우두, 지단, 피구 vs. 반 니스텔로이, 베컴, 긱스’ 대결에 감명받았던 구단주에게는 틀림없이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아브라모비치가 간과한 ‘축구의 현실’이 있다. 2002·2003시즌 올드 트래포드의 멋진 승자였던 레알은 궁극적으로는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바로 그 시즌 정상에 올랐던 클럽은 (유벤투스와 네드베드에겐 안타깝게도) ‘심히 지루했던’ AC밀란이었다. 물론 1998/99시즌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05·2006시즌의 바르셀로나 등의 예와 같이, 광채 나는 공격력으로 무장한 팀들도 정상에 서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팀들조차 ‘그것 한 가지만으로’ 우승에 이른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요즈음의 축구가 일반적으로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무리뉴는 ‘클럽을 자신의 현실 게임의 일부로 생각하는’ 올리가키와 더 이상 같이 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첼시의 문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첼시로부터 건네받을 천문학적 보상금은 차치하고라도) 감독 교체에 뜻이 있는 명문 클럽들의 ‘넘버 원 타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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