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도 한옥에 살어리랏다
  • 노진섭 기자 ()
  • 승인 2007.10.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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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대 ‘주거용’으로 구입 늘어…리모델링으로 불편 크게 감소

 

한옥 하면 겨울철 얇은 문풍지 사이로 몰아치던 황소바람, 한밤중에도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 했던 화장실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의 한옥은 다르다. 내부 구조가 현대식으로 바뀌면서 아파트가 따라올 수 없는 한옥만의 안정감과 온화함을 한껏 살리고 있다.
알게 모르게 진화해온 한옥이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다. 과거 아파트에 밀려 천대받던 한옥이 새로운 주거 문화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냥갑 아파트’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30~40대 젊은층이 한옥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옥살이’가 훨씬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겨울철 추위나 불편한 주차 문제 등은 오히려 한옥살이에 맛을 더하는 양념이라고 말한다.

 
서울 계동에는 손바닥만한 한옥들이 즐비하다. 골목골목을 지나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부엌과 맞붙어 있는 마루 양쪽으로 작은 방이 있다. 모두 42㎡(13평). 마당을 제외하면 주거 공간은 대폭 줄어든다. 답답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 2005년 10월 이곳에 신혼살림을 차린 윤병훈씨(38)는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는데 한옥에 살면서부터 답답함이 사라졌다. 좁은 마루이지만 그곳에 앉아서 탁 트인 마당에 심어진 나무와 하늘을 보면 가슴이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한옥을 찾기 위해 서울 곳곳을 뒤진 윤씨는 지금의 한옥에 반해 1억5천만원을 주고 샀다. 그는 “여름철 처마 밑에 벌들이 몰려들어 벌집 없애는 것이 소일거리가 되었다. 한옥살이에 푹 빠져 지내는 것이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윤씨의 경우처럼 한옥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옥 전문 건축 업체인 대한한옥개발의 김재헌 사장은 “3~4년 전부터 한옥 건축이나 리모델링 의뢰가 부쩍 많아졌다. 지난 3년 동안 100채 정도의 한옥을 짓거나 리모델링했다. 신축과 리모델링은 2 대 8 정도이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재테크에 밝은 30~40대 젊은층이 돈이 되는 아파트를 마다하고 한옥을 찾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집에 대한 관점이나 개념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고 김사장은 말한다. 집을 투자 수단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주거 개념으로 인식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구가도시건축연구소의 조정구 소장은 “재테크에 밝은 젊은층이 한옥을 고집하는 것은 집을 투자 대상이 아닌 삶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옥은 아파트에 비해 환금성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한옥을 찾는 것은 주거 문화가 점차 바뀌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옥에 사는 윤씨도 “30~40대는 윗세대에 비해 비교적 해외 여행을 많이 해본 세대이다. 이들은 외국에서 많은 주거 형태를 경험한 덕에 집에 대한 개념에도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한옥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다. 무엇보다 한옥은 우리나라 지형과 기후에 적합한 집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윤씨는 “높은 천장과 두터운 흙 지붕에 기와를 얹었기 때문에 여름철에도 시원하다. 또 기와지붕 처마가 길어 강한 햇볕이 직접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장마철 문을 열어도 비가 실내로 들이치지 않을 만큼 처마가 길다. 한옥은 남향이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햇볕이 실내 깊숙이 들어온다. 겨울철에 추울 수도 있지만 이중문을 달면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옥에는 외부와 연결된 마루가 있다. 문을 열고 나가서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겨우 땅을 밟을 수 있는 아파트와는 다르다. 마루에 앉으면 하늘과 땅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윤씨는 “한옥은 사람이 계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듣는 즐거움에 TV도 없이 지낸다”라고 말했다.

마루에 앉아서 듣는 빗소리·바람소리
대문을 열면 자동차가 쌩쌩 다니는 대로가 아닌 작은 골목이 있다. 골목을 지나며 마주치는 이웃 사람들과 인사하며 얼굴 도장 찍는 일도 한옥에 사는 즐거움으로 꼽힌다. 윤씨는 “한옥 생활 3년 만에 이제는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아파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웃 간 정을 물씬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옥에 빠진 30~40대는 마당을 한옥의 매력 포인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서울 충정로 2가에 차 한 대 겨우 들어갈 만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5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한옥을 만날 수 있다. 3년 전 살던 아파트까지 팔고 이 집으로 이사온 김영희씨(39·여)는 “어릴 적 한옥에 살 때 비가 세차게 오고 난 뒤 땅에서 뭉실 피어오르던 흙냄새가 그리웠다. 그 흙냄새를 아이들에게도 맡게 해주고 싶어 한옥으로 이사왔다”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ㄷ자형 한옥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에 여러 나무가 심어져 있다. 마당 옆에는 사랑방이 있고 마당 건너편에는 마루가 보인다. 아이들이 숨바꼭질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김씨는 “아파트에 살 때는 아래층에 울릴까 봐 아이들이 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한옥으로 옮긴 후 아이들이 마당과 마루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서적인 면에서 한옥만큼 훌륭한 주거 형태도 없다. 지난 7월 서울 가회동에 있는 한옥으로 이사해온 김일형씨(36)는 이전까지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은행 빚까지 내서 1930년대에 지어진 지금의 한옥(204㎡ 규모)을 구입했다. 무엇보다 1년 내내 자연을 접할 수 있어 크게 만족한다고 했다. 김씨는 “전체 면적에서 절반이 마당이다. 이 마당에는 이전 집주인이었던 78세 할머니가 60년을 살면서 심어놓은 단풍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있어 항상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기분이다”라고 자랑했다.
한옥 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다는 점도 매력이다. 전국에서 한옥 값이 가장 비싸다는 서울 북촌 한옥마을의 경우에도 웬만한 지역의 3.3㎡당 가격은 1천5백만원 안팎이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가격은 더욱 내려간다. 황두진건축사무소의 황두진 소장은 “새롭게 조명된 다양한 한옥의 매력과 집에 대한 개념을 달리하는 젊은층의 코드가 맞아떨어지면서 한옥이 인기를 얻고 있다. 또 한옥에 대한 향수를 살려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키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다. 주차가 곤란하고 비나 눈이 오면 드나들기 불편하다. 마당에 나무와 꽃이 있어 모기 등 벌레도 많은 편이다. 한옥에 사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아파트보다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정도 불편은 한옥에 사는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편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법률·비용 등이 신축·개보수 어렵게 해
그렇다고 해서 전통 한옥을 고집하며 현대 생활의 이점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한옥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실내 구조를 개선하는 가정도 늘고 있다. 황두진건축사무소의 황소장은 “벽을 허물고 문을 터서 마루와 각 방은 물론 부엌과 화장실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 동선을 단순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 또 복층이나 지하실이 있는 한옥을 만들어 용적률과 수납공간을 넓힐 수도 있다. 겨울철 추위를 막으려면 이중 문과 보일러를 이용하면 된다. 한옥은 옛 스타일이지만 현대인이 옛날처럼 살 수는 없다. 내부 구조를 개선하면 현대 생활에 맞는 새로운 한옥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한옥살이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옥의 건축비는 아직 일반 건물 건축비에 비해 비싸다. 나무·돌·종이 등 자재비가 비싸기 때문인데 땅값을 뺀 한옥 건축비는 3.3㎡에 1천만원가량으로 일반 건축비의 3배에 이른다.
법률의 미비도 한옥살이를 쉽지 않게 한다. 서울시립대 건축과 송인호 교수는 “현 건축법은 한옥의 서까래를 몇 개 교체하는 것도 큰 공사로 본다. 건축 면적을 건물 벽면이 아닌 처마 선으로 정하는 등 불합리한 법 규정이 신축이나 개보수를 어렵게 한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난 100년간 주거 형태가 급변한 국가로는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집=주(住)’가 아니라 ‘집=부(富)’라는 공식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집 문화의 변천사를 다룬 <우리가 살아온 집, 우리가 살아갈 집>의 작가 서윤영씨는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가난의 상징이었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는 것이 유행했다. 또 1980년대에는 2층 양옥집이 부의 상징처럼 인식되면서 너도나도 기와집을 양옥으로 바꾸었다. 1990년대 본격적인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아파트가 우리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가 되었다. 이렇게 격변기를 거치면서 한옥은 우리 주변에서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2000년 들어 한옥이 우리 주거 문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한옥을 현대의 삶과 조화롭게 접목시켜 재탄생시키는 것이 중대한 과제”라고 말했다.
한편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서울시내에만  1만8천여 채의 한옥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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