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알고 싶은 것 ‘만화’에 다 있네
  • 전진석 (만화 스토리 작가·청강대 겸임교수) ()
  • 승인 2007.10.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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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지식 풍성한 교양서로 각광…일본 번역서가 대부분, 국내 창작은 ‘걸음마’

 

만화는 어린이만 본다? 아니다. 성인들도 본다. 큰 재벌 그룹의 오너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만화책 좀 보라고 권하기도 하는 세상이다. 아마 그 회장은 세상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임직원들이 그 만화를 통해 얻는 교양과 지식이 대인 관계를 좋게 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크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돈벌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권했을 것이다.
그만큼 요즘 만화는 성인이 얻을 수 있는 교양과 지식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이웃 일본에서도 성인층 독자들이 자꾸 늘어가고 성인을 겨냥한 소재 개발이 한창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유행이 국내에도 먹히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 만화를 보고 성장한 만화에 거부감이 없는 성인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자신이 필요한 분야를 다룬 만화를 찾고 있는 것이다.
만화가 길라잡이 노릇을 하는 성인 교양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갤러리 페이크> : 후지히코 호소노 (서울문화사)
그림과 친해지고 싶다면 경매장을 찾기 전에 인사동 화랑가나 전시회를 찾아다니면서 안목을 키우는 것이 먼저이다. 물론 유명 그림 서적도 읽어보면 좋다. 하지만 이런 미술의 세계는 뭔가 어려워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 전 화제작이 된 <다빈치 코드>는 어떠한가. 소설을 읽으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찾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다빈치 코드>는 미술품에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들과 가설이 스릴 넘치는 전개 속에 펼쳐져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다빈치 코드>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갤러리 페이크>라는 만화를 통해 서양 미술 전체로 범위를 넓혀보는 것도 좋다. 이 만화에는 유명 서양화에 얽힌 얘기와 화랑가에서 벌어지는 미술품 거래에 관한 음습한 얘기까지 두루 담고 있다.
최근 32권으로 완결된 <갤러리 페이크>는 밀로의 비너스가 잃어버린 두 팔에 관한 얘기부터 <모나리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미르의 붓터치 특징이 무엇인지, 왜 일본인들이 고흐 작품에 대해서는 최고가 경매 신기록을 경신하며 싹쓸이 쇼핑을 하는지 그 배경을 알려준다.
만화는 진품이 아닌 모작들만 전시 판매하는 미술관 ‘갤러리 페이크’를 배경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전직 큐레이터였던 주인공이 암시장에서 장물이나 위조품 따위를 거래하며 미술품에 관련된 비밀들을 파헤쳐나간다. 이 과정에서 국제 미술품 암거래상이나 국제적인 도굴단이나 미술품 도난에 얽힌 얘기가 액션물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다만 일본 만화이다 보니 일본화와 일본 화랑가에 대한 설명이 긴 것이 장점이자 단점. 특히 일본 화랑가에서 백화점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판매에 나선다는 대목은 최근 국내 백화점들도 화랑 영업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식 백화점 문화를 이식해온 국내 백화점 업계가 조만간 명품 마케팅 못지않게 그림 마케팅에도 본격화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해 볼 수도 있다.

■ <신의 물방울> : 글 : 아기 타다시 / 그림 : 오키모토 슈 (학산문화사)
만화 쪽에서 와인 붐의 가장 큰 수혜자를 꼽자면 역시 <신의 물방울>이다. 이 만화는 이미 수백 개의 인터넷 동호회를 낳은 와인 애호가들의 공통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와인의 세계에 입문했거나 와인에 호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신의 물방울>은 훌륭한 그림과 스토리로 독자들을 와인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있다. <신의 물방울>이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다 보니 <신의 물방울>에 등장한 와인에 대한 평가 자체가 왜곡되면서 국내 와인 문화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논란까지 생길 정도이다.

 
실제로 동호인들 사이에는 <신의 물방울>에 등장하는 와인 리스트만 별도로 돌아다니고 있고 일부 와인숍에서는 <신의 물방울>에 소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턱없이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는 중저가 와인도 있다. <파워레인저>를 보고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신발을 기어코 신어봐야 하는 아이들이나 <신의 물방울>에 등장하는 와인을 ‘음미’해보고 싶은 어른들의 세계는 결코 멀지 않은 것이다.

■ <맛의 달인> : 카리아 텟츠 (대원씨아이)
<신의 물방울>이 와인 애호가의 필독서라면 <맛의 달인>은 미식가들의 필독서이다. 이제 거의 100권에 가깝게 연재되고 있는 스테디셀러인 <맛의 달인>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요리와 식재료를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그 넓이와 깊이가 대단하다. 만화책을 읽는 것만으로 요리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다.
세상에 맛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려서부터 주는 대로 잘 먹어야 사랑받는다고 교육받아온 우리들에게, 애써 만들어준 음식을 가지고 맛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은 “음식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 복 떨어진다”라며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미식가는 ‘맛있다’ ‘먹을 만하다’ ‘맛없다’ 세 가지로 요리에 대한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입이 짧은 사람일 뿐이다. 진정한 미식가는 재료와 조리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맛있는 것은 왜 맛있는지, 맛이 없으면 왜 맛이 없는지를 지적할 수 있으며,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실제 요리에도 자신을 가지게 된다.
이런 미식가는 오히려 가정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맛의 달인>을 읽는다면 당신도 사랑받는 미식가가 될 수 있다.

■ <식객> : 허영만 (김영사)
곧 드라마와 영화로도 선보일 허영만 작가의 만화 <식객>은 우리나라의 음식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 사람들의 음식이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통해 그려지고 있기에, 먹거리와 연결된 우리들의 삶이 더욱 감동적이다. 허영만 작가가 발품을 팔아 얻은 지식으로 쓰여진 <식객>에는 각지 명물 음식점이 가진 노하우와 토종 식재료의 진정한 맛을 찾아 파헤쳐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맛의 비결을 찾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먹고 산다는 것, 음식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만화이기도 하다.

직장인들 사이에 처세술 다룬 만화 인기
와인과 음식처럼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더라도 어른들이 만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처세술 개론’은 시절에 상관없이 직장인들의 스테디셀러이다. <불모지대>이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이건 간에 처세술 개론의 인기와 역사는 길고 명도 길다.

■ <시마과장> <시마부장> <시마이사> <시마상무> : 켄시 히로가네 (서울문화사)
‘시마’ 시리즈는 어떤 면에서 1990년대를 관통한 실전 처세술 개론이다. 직장 남성들 사이에서 ‘시마’ 시리즈는 <시마과장>, <시마부장>, <시마이사>를 거쳐 이제는 <시마상무>가 될 정도로 오랜 스테디셀러이다.
단순히 중견 직장 남자가 몸으로 겪는 성적 판타지였다면 시마의 인기가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영리하게도 직장 생활을 통해 겪을 수밖에 없는 직장 내 권력 관계나 회사 생활의 비애를 각 에피소드 속에서 실감나는 디테일을  추가해 보여준다. 최근 연재 중인 <시마상무>에선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한 취재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어 흥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 <부자사전> : 허영만 (위즈덤하우스)
허영만 작가는 <부자사전>에서 대한민국 부자의 세계를 그려냈다. 이미 재테크로 성공했다고 알려진 작가가 유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아닌 자수성가형 부자들의 경험담과 재테크 요령을 꼼꼼한 직접 취재를 바탕으로 그려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 <한국의 부자들>을 만화로 재구성한 것인데, 그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더라’ 하는 막연한 노하우가 아니라, 작가가 실제로 만나본 부자들의 인상과 태도, 마음가짐 같은 것을 함께 볼 수 있어서,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 <노다메 칸타빌레> : 니노미야 토모코 (대원씨아이)
최근 국내에서 드라마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온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는 일반인들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주고, 클래식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나왔던 곡들을 연주하는 <칸타빌레 콘서트 - 노다메 칸타빌레를 위한 오마주>가 열릴 정도로 현실 파급력이 컸다. 만화가 클래식 팬을 늘려가고 있는 것.

■ <헬로우 블랙잭> : 슈호 사토 (서울문화사)
<헬로우 블랙잭>은 의료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드라마 <하얀 거탑>은 일반인들에게 생명을 다루는 경외스러운 의사들의 세계 역시 인간 사회의 약육강식 룰이 지배하는 전쟁터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적나라한 인간 관계와 의료 사회의 치부를 귀동냥하고 싶다면 <헬로우 블랙잭>을 들춰보시라. <헬로우 블랙잭>은 도제식 의사 사회의 숨막힐 듯한 계급 문화와 보험 회사, 제약 회사 등 의료 산업계가 ‘공범’이 되는 현장을 까발린다. 물론 모든 에피소드의 결말은 판타지 영역으로 여길 수도 있다. 안 그렇다면 현실이 너무 잔인하다.
일류 의대를 나왔지만, 인간적이고 순진하기만 한 주인공이 순환제 인턴을 지내면서 겪는 현실과 의료계의 관행은 의료계 종사자도, 환자도, 환자의 가족들도 힘겹게 만든다. 의료란 사람을 생명을 다루기에 가장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직업 이익과 병원과 제약사의 이익 계산서 사이에서 비인간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주인공은 이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한다. 그 분노의 끝에는 항상 감동의 눈물이 뒤따르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하고 생각할 때 뒷골이 당기는 경험을 하게 하는 문제작이다.

■ <내 마음속의 자전거> : 미야오 가쿠 (서울문화사)
요즘은 몸의 시대이다. 자전거나 등반, 달리기 또는 인라인 등 어느 한 종목이라도 자신을 위해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이중 자전거는 가장 많은 마니아를 거느린 종목 중의 하나이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전거 한 대에 자동차 한 대 값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자전거 마니아들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대체 자전거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굳이 추천하지 않아도 이미 <내 마음속의 자전거>는 자전거 마니아들의 필독서가 된 지 오래이다. 에피소드마다 담겨 있는 자전거에 관련한 생활 속 이야기들은 자전거와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자전거에 대한 폭 넓고도 깊은 지식을 알려준다.
자전거 타는 법을 쉽게 배우는 기초적인 지식에서부터, 내 생활 환경에 꼭 필요한 자전거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친절한 카운셀링, 그리고 신기한 기능이 추가된 이색 자전거, 자전거가 사실은 자동차나 오토바이처럼 장비 사치를 하자면 끝도 없는 호화 사치 취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자전거 소개까지 자전거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와인계에 <신의 물방울>이 있다면 자전거 마니아에게는 <내 마음속의 자전거>가 있는 셈이다.
이렇게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을 위한 만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른들이 볼 만한 만화는 많이 있다.

■ <만화 조선왕조실록> : 박시백 (휴머니스트)
최근 임진왜란으로 1부를 마무리한 <만화 조선왕조실록>은 날카로운 시사 만화로 인기를 끌었던 박시백 작가가 오랫동안 준비해 내놓은 작품이다. 역사를 다룬 만화라고 해서      <먼 나라 이웃 나라>나 <맹꽁이서당> 같은 어린이용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시사 만화를 주로 그려온 작가는 조선의 정치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정치 만화를 그려냈다.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왠지 요즘의 정치가들의 얼굴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정치라는 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아쉬운 점은 최근 이런 성인물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지만 정작 국내 창작물은 드물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이런 수준 높은 전문 분야 만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전문 기획자들의 역량 때문이다.
우리나라 만화 출판계에서는 성인층을 겨냥한 만화를 개발하는 데 소홀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게다가 청소년보호법이 성인 만화의 소재 개발과 확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도 성인 만화 발전에 치명적이다. 청소년을 보호하자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문화의 힘은 다양성에서 나오고 콘텐츠의 질은 그 완성도에 달려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관련 당국의 현명한 대책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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