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 망치는 ‘공공의 적’들
  • 이재언 (미술 평론가) ()
  • 승인 2007.10.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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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 다툼 속 ‘조형물 비리’ 여전해

 
신정아씨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형물이 새삼 도마에 오르고 있다. 수사의 방향이 신씨의 비자금 조성경위로 쏠려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조형물 비리’라는 새로운 피의 사실을 접하게 된 것이다. 전시 후원금을 몇 억원이나 선뜻 낼 정도의 대형 건설 업체라면 어렵지 않게 선물처럼 안겨줄 수 있는 것이 조형물 중개권이다. 기업을 상대로 한 아트 비지니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이것 아닌가.
사실 몇몇 대기업들이 미술관 전시 후원을 수차례씩이나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미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대목에 관심을 가진 바 있었다.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까지도 주물렀던 신씨가 그런 비지니스를 간과했을 리가 없다는 추측들은 어지간한 미술계 관계자라면 이미 하고 있던 터였다. 법적으로는 ‘미술 장식품’, 보통은 ‘조형물’이라고 일컫는 공공미술 사업의 중개권이야말로 미술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탐내는 이권이다.
중개·심의·설치 전반에 ‘검은 유착’
약 20여 년 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면서 도시 미관을 정비하고, 시민들 삶의 질을 높이는 미적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 공공미술 정책을 마련한 것이 바로 ‘미술 장식품’ 제도이다. 1만㎡ 이상의 건축물이 신축될 때, 건축비의 일정 비율에 해당되는 미술품을 설치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미술이라 함은 우리가 도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벤치나 가로등, 아치 등을 꾸민 스트리트 퍼니쳐(도시 가구), 조각, 벽화, 기념비 등을 말한다. 지금은 어지간한 건물이나 아파트 단지에 속칭 ‘조형물’이라는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어 대중에게 친숙한 편이다.
물론 비율이나 세부 시행령은 여러 차례 개정된 바 있다. 공동주택의 경우는 적용 비율이 낮지만 사무용이나 상업용인 경우에는 건물의 규모에 따라 가격이 수십 억원에 이르고 있어 미술시장에서 이 부문의 치열한 경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 해 공공미술 시장은 대략 2천억원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수도
 
권의 새로운 신도시 건설 붐을 타고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에 있다. 그러다 보니 대형 건설사의 비자금 사건이 터질 때는 조형물이 감초처럼 등장하곤 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중개를 통해 얻어진 커미션의 단순 착복인지, 혹은 기장 누락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세간의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어 이참에 이 제도가 갖는 구조적 모순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공공미술이라 함은 공공재로서 국가 재정이나 공공 기관의 재정을 통해 재원을 충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개인이나 기업에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양적으로는 우리 도시들이 대단히 풍부한 공공미술 작품들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많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개인이나 기업이 건물을 지을 때마다 일정액의 작품을 설치하라는 법규가 아무리 ‘창의적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자발성이 없는 문화적 창조가 얼마나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미술 장식품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자체별로 심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심의는 개별 건축물에 한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도시 전체의 짜임새나 환경을 감안한 절차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상태이다. 게다가 심의를 아무리 공정하게 하도록 심의위원들을 안배했다 하더라도 미의식이나 취향이 한결같지 않은 상태에서는 심의 결과를 놓고 언제나 잡음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건축물은 여러 가지 사정과 정황상 작품이 없어야 좋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억지로 작품을 설치하도록 하다 보니 오히려 미술 작품이 애물단지가 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래서 설치 후 작품을 임의로 처치하는 경우까지 발견되고 있다. 설치 심의만 하고 있을 뿐 행정력이 사후 관리 및 점검을 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건축주들 가운데 더러는 미의식과 문화 마인드를 지니고 있어 법규가 정하는 금액 이상의 작품들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아파트의 경우 회사 브랜드 경쟁이 되다 보니 미술 작품을 자발적으로 추가 설치하는 사례들도 적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건축이 준공되고 나면 분양되거나 하는 건축물들이 많다 보니 건축주가 작품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정작 나중에 입주해서 살아야 하는 주민이나 건축물
 
이용자들이 겪을 고충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 보통이다.
단순히 관심이 없는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작가들을 착취하거나 비자금 조성에 이용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많은 건설사들이 작가에게 주어야 할 금액의 대부분이 착복되거나 혹은 브로커들의 커미션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민간 의존도 낮추고 작가 착취 봉쇄해야
브로커나 중개인들의 횡포도 적지 않다. 실제로 모든 납세와 각종 경비까지도 작가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폭리만을 취하는 파렴치한 브로커들이 미술계에 들끓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부도덕한 건축주의 불법적 거래 대리인 역을 자처하면서 작가들의 착취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물론 프로모션 차원에서 작가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지원·협력을 하여 고도의 전문성으로 창작의 일정 부분을 분담하는 사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한 가격 경쟁 혹은 덤핑으로 점철되어 있어 그처럼 건전하고 유능한 프로모터들이 발붙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고 작가들이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떤 작가들은 건축물이 해당 관청에서 심의를 받아야 하는 약점을 이용해 심의를 빌미로 작품 설치권을 따내는 데만 열중한다. 결국 건축주의 무관심과 브로커 및 작가들의 검은 유착이 맞물리게 되면서 입법 취지와는 동떨어진 공공의 추물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계속 지적되자 미술계 일각에서는 전향적인 방안을 모색해 입법을 시도한 적도 있다. 내용인 즉 건축주가 법으로 정해진 금액을 법정 기관에 기탁해 좀더 공정하고 투명하게, 그리고 규모 있게 필요한 곳에 집행을 하게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다. 여전히 사유 재산을 침해하는 위헌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 공공미술의 민간 의존도를 대폭 낮추고 정부나 지자체의 재정으로 실시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공공미술은 복지와 관광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투자를 해야 하는 부문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제 국가의 문화적 경쟁력을 위해서도 국가가 나서야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급조한 제도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존치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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