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은 약에 애먼 병 생길라
  • 왕성상 전문기자 ()
  • 승인 2007.10.15 15:4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사 중복 처방에 엉터리 약품까지 유통…희귀 약품 공급사 ‘독점’ 횡포

 
경기도 분당에 사는 정 아무개씨(54). 그는 최근 위가 좋지 않아 동네 내과의원을 찾아 진료와 약 처방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약국에서 준 약을 먹으려다 깜짝 놀랐다. 지난 9월 추석 연휴 전 다른 병으로 그 의원에서 처방받아 지어먹은 약과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올 봄 감기가 심해 같은 의원에서 주사를 맞고 먹었던 약 중 남은 것을 살펴보았다. 약봉지의 내용물들이 거의 비슷했다. 정씨는 이튿날 해당 의원과 약국에 “아픈 데가 다른데도 같은 약을 세 번이나 줘도 되느냐”라고 따졌다. 그러나 답변은 “괜찮고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찜찜해서 먹던 약을 버리고 서울 시내 직장 부근의 병원에 다니고 있다. 처방받은 약 중에 정신 신경제와 최면 진정제 등 오·남용 우려가 있는 품목이 들어있었는데도 1주일 이상 중복 복용한 것이다.
지난 5월11일 혈관성 두통과 고지혈증, 천식, 관절염으로 같은 병원 내 신경과와 내과에서 처방받은 한 여성 환자의 경우이다. 병원측은 위장약인 무코스타 정을 중복 처방한 사실이 드러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으로부터 진료비 삭감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이 환자는 이미 약을 다 먹은 뒤였다.

위장병 때문에 의원 찾았더니 감기약 주기도
이처럼 질병이 다른데도 같은 의원에서 성분이 같은 약을 이중으로 처방받아 피해를 입는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또 품질 부적합 판정을 받은 불량 약품이 공공연히 유통되어 환자들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문희 의원실이 심평원으로부터 받은 ‘중복 처방 실태 조사 자료’와 대통합민주신당 장복심 의원실이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을 통해 받은 ‘품질 불량 의약품 회수 폐기 현황’을 통해 드러났다.
중복 처방의 사례는 일반 의원급 진료 기관에서 많다. 심평원이 의료보험 적용 환자의 중복 처방 심사를 시작한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9만8천8백75건으로 집계되었다. 액수로는 8억5천여 만원이며 △2006년 4분기 1만8백54건 △2007년 1분기 2만9천20건 △2분기 2만5천6백28건으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다.
중복 처방이 느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부 의사나 약사들이 전문 지식 또는 윤리 의식의 결여로 중복 처방을 당연시하며 환자의 건강을 소홀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환자들의 약 과다 복용은 물론 재정 부실이 우려되는 건강 보험 부담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게다가 심평원이 이에 대한 뚜렷한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문의원실의 관계자는 “심평원이 의료 기관에 중복 처방 체크 시스템을 갖추도록 적극 나서지도 않고 관련 현황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건강보험 전체로 심사 대상을 넓히면서 사후 심사가 아닌 사전 점검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치 개발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품질 규정 위반 약으로 인한 폐해도 보통이 아니다. 제약사들이 품질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약품의 회수 및 폐기를 느슨하게 해 국민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식약청 자료에 따르면 2005년 한해 적발된 부정 의약품은 96건, 7백52만4천여 개가 유통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약이 회수·폐기된 양은 전체의 13.2%인 99만5천여 개에 그쳤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나머지 86.8%(6백52만9천여 개)는 약국 또는 약품 도매상에 남아 있거나 국민들이 먹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25건에 4백87만5천여 개가 약사법을 어긴 약이었으나 27만여 개(5.6%)만이 회수되었을 뿐이다. 최근 2년 동안 법을 어긴 약품이 1천2백만개가 넘고 국민들이 먹은 것으로 추정되는 불량 약품이 1천1백만개 이상 된다는 계산이다. 제약사들의 리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약 중에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큰 제약사 제품들까지 끼어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제약 업계 상위권을 달리는 ㅎ약품이 대표적이다. 감기약 ‘코싹정’은 2005년 함량 및 용출 시험 부적합으로 5개월여 생산 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과징금 5천만원 납부로 대신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생산된 ‘코싹정’ 29만7천5백40정 중 10.7%인 3만1천9백40정만 거두어들이고 나머지는 그대로 유통시켰다. ㅅ제약의 코 감기약 ‘삐삐콜플러스정’도 비슷한 경우이다. 용출 시험 부적합으로 6개월 동안 만들지 못하도록 처분받았지만 생산량(49만5천5백정) 중 0.8%인 4천정만 회수되고 나머지 99.2%는 시중에 유통되었다. 중견 상장사인 ㅎ제약 또한 골다공증 치료제 ‘아렌드정 5mg’이 용출 시험 부적합으로 석 달간 제조 정지를 당했으나 생산된 48만8천2백정 가운데 1.3%인 6천2백80정 회수에 그쳤다.
이에 대해 한 제약 업계 관계자는 “부정 의약품이 원천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쩔 수 없이 생산·유통되었더라도 출고 약품에 대한 사후 관리가 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법 의약품이 넘쳐나 국민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 제약 산업에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질 좋고 값싼 미국 약들이 몰려와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된다는 견해에서이다. 특히 신약 개발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국내 제약 업계의 양극화는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줄도산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제네릭(복제 의약품)만으로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없고 더욱이 규정 미달 또는 불법 약품으로서는 자생력을 잃게 된다’는 설명이다.

제약사들, 부적합 약품 리콜에 무관심
약품의 잦은 품절과 약국의 부실한 복약 지도(약 사용 및 복용에 대한 설명)도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어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지방과 서울·수도권 변두리의 영세한 약국에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 안내 없이 약 공급을 끊거나 약사가 어렵게 수소문해야만 확보할 수 있는 사례는 약 업계의 관행처럼 되어 있다. 물론 품절을 가장하고 처방을 많이 하는 병원 등 특정 거래처에만 약을 대주는 일부 의약품 도매상의 책임도 크다.
서울 양천구에서 조그만 약국을 운영하는 윤 아무개씨는 올 여름 억울한 일을 당했다. 안과 처방에 자주 쓰이는 항생제 점안액이 바닥나 거래 도매상에 요청했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래량이 많은 부근 약국에는 그 제품이 공급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동네 단골 손님들을 놓치게 되었고, 약국 매출도 뚝 떨어졌다.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혼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달래야 했다.
의약품 공급사들의 횡포도 약국과 환자들을 괴롭히는 요인이다. 거래 규모가 크고 희귀 특허 약품을 다루는 곳일수록 더욱 그렇다. 올 상반기에 일어났던 ‘쥴릭파마 사태’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화이자, 노바티스 등 17개 다국적 제약사 약의 독점 공급권을 가진 쥴릭파마코리아(주)가 지난 5월 국내 의약품 도매 업체의 유통 이윤을 낮추는 과정에서 전국 약국들에서 품절 현상을 빚어 한동안 시끄러웠다.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져 결국 대한약사회가 불끄기에 나섰다. 물의를 빚은 쥴릭파마와 17개 다국적 제약사, 도매 협회와 긴급 회동을 갖고 재발 방지 합의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행 실적은 미진하다. 중간 마진율을 낮추려는 쥴릭파마와 이에 반기를 들고 집단 행동에 들어간 도매상들이 맞부딪혀 약국과 환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일선 약국의 진열장이 비게 되었고, 환자들도 약을 제때 사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환자에게 약 사서 되팔기도
공급사들이 횡포를 부려도 공급 차질을 막을 법적 제재수단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자연히 제약사나 유통 업체들의 대응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의약품 공급 보고 의무화 등을 위한 약사법 시행 규칙 개정안이 지난 8월 말 입법 예고되었지만 아직 국회 처리 절차가 남아 있다. 개정안은 의약품 제조업자나 수입자가 의약품 공급이 중단되거나 부족 사태가 예상될 경우 그 사유 및 공급 일정에 대한 세부 계획을 보건복지부에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허술한 복약 지도와 변칙적인 약국 영업 또한 환자 보호를 위해 짚고 넘길 대목이다. 환자에게 직·간접으로 피해를 주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약에 대해 설명을 잘 해주지 않는 경우와 무자격자가 약을 파는 행위이다. 지난해 식약청이 시·도와 합동으로 벌인 약사 감시 단속에서도 이런 사례들이 무더기로 적발되었다.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복약 지도를 해주지 않아 행정 처분을 받은 약국이 10곳에 이른다. 이는 환자가 신고를 해서 걸려든 곳일 뿐 사실상 복약 지도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 약국이 수두룩하다는 것이 의약품 업계 사람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유동 인구가 많고 주로 뜨내기 손님을 상대하는 길가 약국에서 이런 일들이 잦다. 얼마 전 서울 관악 지역 ㅇ약국의 경우 복약 지도를 받지 못한 환자 몇 명이 건강보험공단에 신고해 실사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특이한 불법 행위로 환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약국도 적지 않다. 대구의 ㅍ약국, 경기도 ㅅ약국은 종업원이 약사처럼 흰 가운을 입고 약을 팔다 단속망에 걸려들었다. 대전 ㅈ약국 대표는 약사 자격증을 빌려 약국을 운영해오면서 약제비를 청구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서울시내 또 다른 약국은 환자로부터 사들인 약품을 다른 사람에게 되팔다 철퇴를 맞았다. 지저분한 약장 등 위생 상태가 나빠 행정 처분을 받은 약국도 7군데에 이른다.
이밖에 약품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약화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도 문제이다. 약의 모양이나 색깔이 갑자기 바뀌어 약국과 환자들이 당황하기 일쑤이다. 제약 회사 내부에서는 알고 있지만 약사와 환자들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의약 분업 전에는 약사가 이처럼 약품 정보를 잘못 알고 조제하다 환자가 숨지거나 중태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