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없는 진실 추구가 <시사저널> 창간 정신이었다”
  • 대담:심상기 <시사저널> 발행인·정리:소종섭 기자 ()
  • 승인 2007.10.2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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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정직성과 공정성에 입각한 진실을 제시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자유 사회의 사려 깊고 다원적인 대화란 성립될 수 없다.”
어느덧 18년이 흘렀다. 1989년 <시사저널>은 언론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주간지다운 주간지, 자본과 권력 등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언론의 본령을 가는 독립 언론의 탄생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면서 주목되었다.
<시사저널> 편집인 겸 주필을 역임한 박권상 전 KBS 사장은 태동 과정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본 산증인이자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편집의 기본 뼈대를 잡은 주인공이다. 창간 18주년을 기념해 박 전 사장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1989년 10월부터 1991년 2월까지 15개월 동안  <시사저널>을 만든 그는 78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확한 기억력과 또렷한 말씨로 창간 과정과 창간 정신에 대해 증언했다.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박 전 사장은 취재진을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각종 서적과 신문 자료 등으로 가득찬 방은 그의 언론 인생을 보여주는 나이테와 같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다른 벽면을 메운 책장들에는 책이 흘러넘쳐 바닥까지 쌓여 있었다. 그는 환한 얼굴로 <시사저널> 발행인인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을 맞았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건강해진 것 같다.
한쪽 다리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나이 탓인지 별로 좋아지지 않고 있다. 병원에 다니며 물리 치료를 받고 있다.

<시사저널>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
<시사저널>이 창간된 1989년에 나는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해직된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다. 복직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개해 당시 발행인이던 최원영씨를 만났다. 문화에 관심도 많고… 느낌이 괜찮았다. 1989년 1월9일 처음으로 출근하며 인연을 맺었다.

일간지 기자로 있었는데, 주간지가 낯설지 않았나?
내가 갖고 있는 언론 철학은 ‘진실’이 모든 것에 앞서는 가치라는 것이다. 진실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언론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과 상반된 측면도 있다. 바로 시간적인 제약이다. 라디오 같으면 매 시간마다, 신문 같으면 하루마다 나온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언론이라고 해도 시간적인 제약이 있다. 이 때문에 전부터 언론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문맥, 실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상성을 갖추려면 시간이 긴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월간지는 시사성과 직결이 안 되니 1주일 단위로 발행한다면 시사적이면서도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진실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주간지에 생명이 있다고 판단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모였던 것으로 안다.
서울대에 수석 입학했던 박순철 경제편집위원, AP통신 기자와 동아일보 부국장을 지낸 진철수 편집주간, 동아일보 사진부장 출신인 조천용 사진 편집위원, 현재 YTN 사장으로 있는 표완수 국제 편집위원, 한국일보 부국장을 지낸 김승웅 국내 편집위원, 한국일보 기자 출신 신중식 조사분석실장, 기자협회 사무국장을 지낸 김동선 문화 편집위원 등 인재들을 불러모았다. 구성원들이 괜찮았다. 진실을 추구하는 공동의 광장을 열자는 데 호흡이 일치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신선하고 세련된 디자인이 화제였다.
창간호에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영국 런던의 더 타임스 디자인 담당 부국장인 에드윈 테일러 씨를 불렀다. 그는 3개월 동안 <시사저널> 디자인의 틀을 잡았다. 돈 많이 들였다. 중앙일보도 1995년쯤 그를 초빙해 몇 달간 디자인을 혁신했다. 그는 신문 디자인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가였다. 워싱턴포스트에 근무하던 올슨 여사도 1년간 <시사저널>에 근무하며 디자인을 담당했다. 18년이 지났지만 지금 보아도 당시의 산뜻한 디자인이 질리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명성 있던 빌리 브란트 전 총리도 초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알려져야 한다. 그래서 당시 ‘동방 정책’으로 유명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일 디 차이퉁의 정치부장이었던 크리스토퍼 버트람씨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잘 아는 사이였다. 내가 동아일보 영국 특파원으로 있을 때 그가 영국 IISS(국제전략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1989년 4월 초 그가 서울에 왔을 때 그에게 빌리 브란트씨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동아일보 등 대신문이 불러도 안 오는데 오겠느냐’라며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뒤 ‘브란트 총리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관심이 많다’라며 성사될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해왔다. 5월 초 서베를린에서 열린 IPI(국제의원총회) 총회에 가서 기조 연설을 한 브란트 씨를 직접 만나 초청했다. 창간호가 나오기 직전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한국에 왔다. 1주일 동안 머무르며 판문점이나 통일전망대 등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브란트 전 총리를 만나려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일종의 국빈이었다. 나치 치하에서 장기간 감옥살이를 한 그는 동방 정책, 사회민주주의, 저항 등의 상징이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불러 북방 정책 등을 주제로 환담했다. 서로들 끼어들려고 난리였다. 그는 뜻은 진보적이었지만, 행동은 보수적이었다.

<시간의 역사>로 유명한 호킹 박사도 오지 않았나?
우연히 1990년 8월15일자 아사히신문 1면에 ‘호킹 박사를 초청했으니 입장권을 받아가라’라는 안내문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귀가 번쩍했다. 당시 최원영 발행인이 영국에 있을 때라 바로 교섭했다. 호킹 교수가 일본 교토로 가는 것을 중단시키고 이틀 앞당겨 서울로 왔다. 그가 젊은 사람들한테 그렇게 유명한지 몰랐다. 그 무렵 야당 당수로 파리 시장이었던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청백리의 표상으로 불렸던 잠롱 전 방콕 시장도 초청했었다.

<시사저널> 창간은 사회적으로도 반향이 컸다.
발행이 되기도 전에 정기 구독을 하겠다는 사람이 1만명에 달했다. 발행 이틀 만에 50%가 팔렸다. 1989년 10월19일 프라자호텔에서 창간 기념 리셉션을 했는데, 8백50명이 몰렸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박준규 등 여야 당 대표와 국회의장, 국무총리 등 대통령을 빼놓고 웬만한 사람은 다 왔다. 나도 발행인도 신이 났었다.

편집 방향은 어떤 것이었나?
한마디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발행인은 편집의 기본 방침을 정했고, 편집인은 발행인의 위임을 받아 실제적으로 편집권을 행사했다. 최원영 발행인은 창간에 즈음해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히며 자유와 책임의 참언론을 구현합니다’라는 방침을 밝혔다. 고마운 점은 발행인이 기자들이 능력을 발휘할 여건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이다.
발행인·편집인 기자들이 호흡을 맞추었다. 모두들 죽어라고 한없이 일했다. 한완상·한승주·한승헌·최일남 씨 등이 칼럼을 썼다. 고료를 후하게 주었다. 취재비 등을 실비로 지급해 긍지와 자존심을 갖게 해주니 기자들도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 좋은 필진을 구축했고, 이미지를 잘 관리했다. 해설적 심층 보도, 건전한 엔터테인먼트 기사를 추구했다. <시사저널>은 말썽도 많았지만, 겁이 없었다.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같은 대형 기획물도 설치했다. 누가 순위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말이 많았다.

<시사저널>이 이런 매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관점에서 한 말씀 해달라.
창간 정신을 계승했으면 한다. 창간호 시론에 ‘디오게네스 철학과 참언론’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거기에 다 나와 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자유롭게, 그러나 책임 있게 보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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