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묵은 도요타의 ‘원죄’
  • 심정택 (자동차산업 전문가) ()
  • 승인 2007.10.2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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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타는 2006년 사상 최고인 2조2천억 엔(약 18조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사실상 GM을 추월한 세계 1위의 자동차 업체로 평가 받는다. 그런 도요타이지만 한국 시장에서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한국도요타자동차는 2000년 3월 설립되었다. 렉서스는 그 이듬해인 2001년 1월부터 출시했다. 수입차 업계에서는 도요타가, 닛산이 한국 상륙 시점을 밝힌 2008년 8월 이후 한국 시장에 본격 진출할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2001년 삼성캐피탈의 유석렬 사장(현 삼성카드 사장)과 조현국 상무는 일본 도요타 본사의 한 상무를 만나, 도요타의 한국 진출시 사업 제휴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배경에는 삼성그룹이 자동차 사업을 포기한 이후 날로 커지는 국내 자동차 할부 금융 시장에서 도요타의 노하우와 자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도요타는 국내에 렉서스라는 세컨드브랜드를 론칭시켜놓고도 외부 노출을 꺼렸다. 그때 도요타의 한 임원은 “한국 시장에 대해 걱정이 많다. 소형 승용차는 한국 업체의 품질이 좋아져 정면 승부가 곤란하다”라면서 렉서스를 한국 시장에 먼저 진출시킨 전략을 공개했다.   
도요타가 한국 상륙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한국 정부에 지은 ‘원죄 의식’ 때문일 것이라는 게 국내 일본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분석이다. 도요타는 1971년 신진자동차와 제휴를 맺고 KD(Knock Down) 부품을 공급했다. 그러던 중에 일본과 중국 간 국교 정상화 얘기가 나왔다. 일본과 중국 국교 정상화의 기본 방향인 ‘주은래 4원칙’ 중 ‘타이완이나 한국 투자 기업은 중국에 진출할 수 없다’라는 조항 때문에 도요타는 신진과의 합작 계획을 포기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오원철씨는 회고록에서 “그때 우리 정부가 겪었던 수치와 분노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1970년 기아자동차에 입사했던 전 기아차 재무담당 이사 신동찬씨는 “당시는 국내 1위 업체였던 기아자동차의 연간 매출액이 100억원을 막 넘기던 한국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였다”라고 기억한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의 대안으로 1972년 GM과 50 대 50의 합작 제휴를 했다. 신진은 1976년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꾼 후 산업은행 관리 업체가 되었다가 대우가 1978년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한 뒤 대우자동차로 탈바꿈했다.
도요타가 렉서스를 앞세워 국내 재진출을 시도하면서 조심스러워했던 배경에는 이런 과거의 인연이 깔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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