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지 않은 대선 잔금 덩어리 또 있었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7.11.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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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대선 자금 수사 때 드러나지 않은 ‘한나라당 자금’이 또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검찰은 당시 한나라당에 대한 압수 수색을 검토했으나, 최병렬 대표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실행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드러나지 않은 자금은 검찰 수사 과정이나 당 안팎에서 알려진 자금 규모의 2분의 1 수준이다”라며 이미 알려진 대선 자금 외에 또 다른 덩어리의 자금이 있었음을 밝혔다. 이 관계자의 말대로라면 또 다른 대선 잔금은 적게는 80억원, 많게는 4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또 다른 대선 잔금’은 한나라당뿐 아니라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 등도 큰 관심이 있는 만큼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출마와 함께 요동을치는 대선 정국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11월1일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이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열어 ‘한나라당의 2002년 대선 자금’ 문제를 터뜨렸다.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가 기정사실로 굳어져가던 때였다. 이총장은 기자들에게 “2002년 대선 당시 대선 자금 모금과 잔금 사용 내역 등이 적힌 최병렬 전 대표의 수첩을 보았다. 이 전 총재도 연관될 수 있는 수첩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총장의 회견 내용대로라면 정가에 메가톤급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는 사안이다. 대선 잔금의 존재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돈의 쓰임새와 관련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2003년 대선 자금 수사를 진행했던 검찰,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삼성 등 관련 기업들까지 다시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정가에는 당시 대선 자금 수사가 여·야 간 타협의 산물로 결론났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선 잔금’ 문제는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그러나 터질 것 같던 대선 자금 모금과 잔금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총장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총장의 기자회견 직후 최 전 대표는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럴 수 있느냐. 밝혀도 내가 밝혀야지, 내게 밝히라 마라 할 수 있느냐”라며 격분했다. 이총장은 최 전 대표의 부산고 후배로 지난 2002년 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에 뛰어들었을 때 기획본부장을 맡았을 정도로 친분이 깊은 관계이다.
‘대선 자금과 잔금’ 문제는 이명박 후보 쪽에서 특히 관심이 많다. 이회창 전 총재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총장의 기자회견이 있기 얼마 전부터 정가에는 이와 관련한 얘기가 나돌았다. 이 문제 때문에 이 전 총재가 쉽게 대선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핵심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자유로운 이후보측은 거리낌 없이 이 문제를 제기해도 큰 타격이 없으리라고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관심이 집중되자 이 전 총재는 출마 기자회견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검찰에서 다 조사된 것으로 안다. 나 자신이 검찰에 자진 출두해 조사받았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미 조사되고 다 알려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 정치권이나 언론이 대선 잔금과 관련해 제기한 문제는 삼성이 이 전 총재에게 무기명 채권으로 준 2백50억원과 관련해서이다. 이 돈 가운데 대선 때 쓰고 남은 돈이 1백54억원인데, 이 중 16억원을 당에서 쓰고 1백38억원은 이 전 총재의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가 보관하고 있다가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가 시작된 뒤 삼성측에 돌려주었다는 것이 당시 검찰의 발표 내용이었다. 한나라당 일부 인사들은 1백38억원이 그대로 삼성측에 반환되었는지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일부가 이 전 총재측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방호 총장의 기자회견 이후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이런 맥락이다. 그야말로 ‘대선 잔금 향방의 미스터리’이다. 대부분은 2003~2004년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최 전 대표, 검찰 고위 인사에게 들은 내용 수첩에 기록”

그러나 <시사저널> 취재 결과 ‘최병렬 수첩’에 담겨 있는 폭발력 있는 내용은 이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최 전 대표는 과거에 한 측근에게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나라당에서 한두 명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병렬 수첩’의 내용과 관련해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비교적 자세히 상황을 설명했다. 경선 당시 박근혜 전 대표의 캠프에 몸담았던 이 인사는 상대적으로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다. 다음은 이 관계자의 증언이다.
“수첩의 존재에 대해 최 전 대표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다. 기자 출신인 최 전 대표는 자세히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2003년 8월 대선 자금 수사가 시작된 지 3개월쯤 지난 11월 하순, 검찰의 한 고위 인사가 최 전 대표를 찾아온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문을 닫아걸고 밀담을 나누었다. 당시 검찰은 대선 자금 수사와 관련해 한나라당을 압수 수색하려고 했었다.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이었던 만큼 갑자기 압수 수색하기가 부담스러워 ‘왜 압수 수색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방문한 자리였다.
최 전 대표는 이 인사가 제시한 자료와 설명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수첩의 핵심 내용은 당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회창 전 총재와 관련이 있다. 이 일이 있은 뒤 최 전 대표는 이 전 총재에 대해 인간적인 실망감을 가감 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검찰 인사는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자금이 한나라당에 들어온 흐름을 이야기하면서 압수 수색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것으로 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최 전 대표는 당시 압수 수색을 당하게 되면 한나라당이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날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하룻밤을 꼬박 샌 그가 꺼내든 카드는 단식 투쟁이었다. 이어지는 이 관계자의 말이다. “최 전 대표는 2003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초까지 단식을 했다. 그때 주변에서도 왜 단식을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청와대도 ‘특검을 안 받겠다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가 내건 목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비리에 대한 특검 수사를 관철하겠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검찰의 압수 수색 시도에 맞서 청와대를 향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여·야 대선 자금 문제를 다 까자’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보낸 것이었다. 결국 압수 수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대선 잔금 규모, 알려진 것의 2분의 1쯤 될 것”

이 대목에서 주목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최 전 대표가 12월5일 단식을 끝내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 전 총재가 방문해 둘이서 30분간 밀담을 나눈 일이다. 최 전 대표는 “대선 자금 이야기도 나왔다”라고 공개한 적이 있다. 어쨌든 이때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더 멀어졌다. 최 전 대표는 “있는 그대로 다 밝히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다”라며 이 전 총재를 압박했고, 이 전 총재는 “아는 것이 없다”라며 버티기로 들어갔다. 최 전 대표가 단식을 끝내고 처음 당사에 출근한 2003년 12월11일,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이례적으로 기자간담회에서 “정당 스스로 진상을 공개하는 것이 국민의 바람이며 우리가 처벌을 최소화하는 명분이 될 것이다”라며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2004년 2월17일 관훈토론회에 나간 최 전 대표가 “불법 대선 자금의 중심에는 이 전 총재가 있다. 이 전 총재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으며 감옥에 가더라도 본인이 가겠다고 했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대선 자금과 관련해 공개할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을 알고 있던 최 전 대표가 이 전 총재를 향해 모든 내용을 털어놓은 뒤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 총재에 대한 최 전 대표의 공세는 당내 역풍에 부닥치면서 오히려 최 전 대표가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또 대선 자금 수사는 모양 갖추기를 통해 적절히 봉합하는 형태로 마무리되는 수순을 밟았다. 한나라당의 또 다른 관계자도 ‘최병렬 수첩’의 존재 사실을 인정했다. 이 관계자는 “이방호 총장이 이야기한 부분은 모두 사실이다. 지난 대선 자금 수사에서 모금 과정과 관련해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검찰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규모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이 관계자는 “알려진 것의 2분의 1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가 말하는 ‘알려진 것’이 당시 한나라당이 모은 8백억원을 말하는 것인지, 쓰고 남은 1백58억원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느 경우든 상당한 금액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드러나지 않은 자금은 최소 80억원, 최대 4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대선 국면에서 느닷없이 ‘판도라의 상자’로 떠오른 대선 자금 문제가 이른 시일 내에 속속들이 공개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해 관계자 누구도 공개되기를 원치 않는다. 이명박 후보측은 확실한 정보가 없다.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내막을 알고 있는 최병렬 전 대표는 “다 끝난 일이다”라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이 문제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지는 두고 볼 일이다. 새로운 정권이 등장하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자금과 당선 축하금, 삼성의 비자금 조성 등과 ‘한나라당의 대선 자금과 잔금’ 문제는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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