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가까운 게 죄?
  • 왕성상 (wss4044@sisapress.com)
  • 승인 2007.11.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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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세청장 출신들, 대선 자금 모금 등 추문으로 낙마·구속 사례 많아

 
국세청장은 정부 핵심 요직으로 꼽힌다.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과 함께 정권을 지탱하는 ‘빅 4’로 인정받는다. 차관급이지만 장관·부총리 못지않게 힘이 세다. 1966년 3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재무부 사세국을 떼어내 국세청을 만든 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재정 충당을 위해서였다. 탄생 자체가 정권 및 돈과 연관이 깊다. 그렇게 해서 출범한 국세청의 초대 청장은 군 출신인 이낙선씨. 5·16 군사정변에 앞장 선 공로로 국세청장이 된 것이다. 이후 지난 11월6일 밤 전격 구속된 전군표 전 국세청장을 포함해 15명의 청장이 배출되었다. 이들의 평균 임기는 약 2년9개월.
10·26 사태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국세청은 이낙선·오정근·고재일·김수학씨 등 4명의 국세청장이 지휘했다. 그 무렵 국세청장들은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국세청이 안정 궤도에 설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데 전념했다. 1988년 3월 7대 서영택 청장 취임 전까지는 이낙선·오정근·고재일·안무혁·성용욱 청장 등 5명의 군 출신이 수장을 맡아 ‘조직의 안정화’라는 소임을 착실히 수행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 이후에는 민간 출신 청장이 등장했다. 
 
 
역대 국세청장들의 절반은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장관으로 영전되거나 공직에서 명예롭게 물러나기도 했다. 15명의 역대 청장 중 8명이 장관으로 올라갔다. 영전의 자리는 주로 건설교통부(건설부 포함)장관이었다. 그래서 ‘국세청장→건교부장관’코스가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영전자 중 이용섭 전 청장(14대)만이 유일하게 행정자치부장관을 거쳐 건교부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재직 중 각종 사건으로 낙마하거나 구속당한 사례가 적지 않다. 막강한 힘만큼이나 부침이 심했다는 얘기이다. 국세청장 출신들이 ‘불명예 전당’에 오른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원인은 불법 대선 자금 등 돈 때문이다. 당시 안무혁·성용욱 청장이 첫 테이프를 끊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87년 10월 국세청장에서 자리를 옮긴 안무혁 안전기획부장과 성용욱 국세청장을 통해 대선 자금을 모았다. 이로 인해 이들은 1996년 8월26일 나란히 법정에 서 각각 징역 3년씩을 선고 받았다. 둘 다 법정 구속은 되지 않았지만 국세청이 정치 자금 창구가 되거나 모금 역할을 한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다.
1982년 5월부터 5년여 국세청장을 지낸 안씨는 개청 이래 가장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육사 14기인 그는 공병여단장과 건설공병단장을 지내다 1980년 국보위 건설분과 위원을 지내며 12·12 세력과 인연을 맺었다. 육군 제1공병단 여단장(준장)을 지내던 1981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가입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사회정화위원장에서 국세청장이 된 그는 ‘국세청은 청와대와 가까워야 한다’라며 청사 이전을 추진했다. 청와대와 재무부 등이 이를 받아들여 서울 양평동에 있던 청사를 지금의 수송동 건물(전 합동통신 사옥)로 옮겼다. 또 서울지방국세청장의 1급 승격과 함께 직세·간세·조사국장을 3급 부이사관으로 격상시키고, 여의도 등 6개 세무서를 신설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 명성그룹 조사 등 대형 사건들을 건드려 눈길을 모았다.
안청장에 이어 취임한 제6대 성용욱 국세청장은 9개월짜리 최단명 청장이었다. 1987년 5월27일부터 1988년 3월4일까지 몸담으면서 부인의 수뢰 사건으로 옷을 벗었다. 1989년부터 2년간 미국 버클리 대학 교환 교수로 근무한 뒤 1992년 안기부 1차장으로 중용되었으나 또 한 차례 수난을 당했다. 1996년 대선 자금 모금 사실이 터져 결국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불명예 전당’…7~9대 국세청장들은 ‘조용’

7대 서영택 청장, 비고시 출신으로 8~9대 연임 기록을 세운 추경석 청장(현재 국세동우회장)은 잡음 없이 넘어가 건교부장관으로 영전했다.
7년여 조용했던 국세청장 자리는 후임 임채주 청장 때 또 한 번 회오리쳤다. 김영삼 정부 말기의 국세 행정을 책임진 임청장은 공직의 시작과 끝을 세무공무원으로 장식한 인물이다. 하지만 국세청 개청 이래 최대 추문인 ‘세풍 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했다. 
국세청 사상 첫 호남 출신인 안정남 청장도 끝이 좋지 않았다. 그는 1999년 5월 김대중 정부 시절 12대 국세청장에 임명되었다. 재임 때 강력한 추진력으로 국세청 개혁에 공을 세웠지만 건교부장관으로 영전해서 곤욕을 치렀다. 투기 등 축재 의혹으로 20여 일 만에 장관직을 내놓고 만 것이다. 이어 같은 호남 출신인 13대 손영래 청장도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국세청장을 지낸 그는 퇴임 뒤인 2003년 썬앤문그룹 세금 감면 청탁과 관련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걸려들었다.
14대 이용섭 청장에 이어 취임한 15대 이주성 청장 역시 불명예 퇴진을 해야 했다. 지난해 6월 인사를 둘러싼 내부 투서로 옷을 벗은 것이다. 그는 감사·기획 분야는 물론 국세청 조사 1과장, 중부청 조사 1국장, 서울청 조사 2국장 등을 거친 세무조사통으로 윗선으로부터 신뢰를 받았지만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현직 국세청장으로 사상 처음 구속된 전군표 청장(행시 20회)은 중부청 조사 1국장, 서울청 조사 1·3국장, 국세청 조사국장을 거친 조사 전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강원도 삼척 태생이지만 강릉고와 경북대 행정학과를 나와 ‘반 대구·경북 인맥’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2005년 3월 국세청 조사국장에서 쟁쟁한 행시 선배들을 제치고 국세청 서열 2위 차장직에 발탁되어 눈길을 모았다. 그는 이주성 청장과 손발을 맞추어가며 국세청 개혁을 이끌다 이청장이 옷을 벗자 곧바로 사령탑에 앉는 행운을 안았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김대중 정부 때까지 3년여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한 데다 노무현 정부 출범 때는 대통령직 인수위에 파견되어 정치 감각도 충분히 익혔다는 평을 듣곤 했다. 2003년 1월 대통령직 인수위 경제 1분과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그는 정무분과에서 일했던 정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과 만나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청장 취임 전부터 국세청 내에서 신망이 높았다. 취임 전 정부 부처 실·국장급 다면 평가에서 상사·동료·부하로부터 모두 1위를 받은 바 있다. 그는 지난해 ‘종합부동산세 드라이브’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참여 정부의 근간을 지켜내는 큰일을 해냈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청장 취임 후 1년여 동안 이번 일 말고도 각종 잡음에 시달렸다. 지난해 10월에는 청장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세청 과장급 직원들이 국회의원 보좌관들에게 돈 봉투를 돌렸다는 사실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다. 올해 초에는 언론사 세무조사를 하면서 “한 언론사로부터 사생활에 대한 보복 취재를 당했다”라고 밝혀 파문이 일었다. 게다가 이명박 대선 후보 재산을 조사했다고 해서 한나라당으로부터 검찰 고발을 당하는 등 크고 작은 시련을 겪었다. 더욱이 강원도 출신 최초 국세청장으로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 갔지만 한때 주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지역구(동해·삼척) 출마를 권유 받았고, 최근 비례대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소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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