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해도 ‘시끌’ 말 안 해도 ‘시끌’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7.11.1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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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합당 선언’ 등에도 이례적 침묵…“영향력 약화 탓” “의도된 발언 자제” 해석 분분

 
침묵을 지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11월12일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합당 선언에 대해 말을 아꼈다. 지난해 말 열린우리당 내에서 민주당과의 합당론이 제기되자 ‘지역 정당으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던 노대통령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할 말은 많은데 해줄 말은 없는 듯이 보였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도 양당 합당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언급할 것이 없다”라는 반응만 내놓았다.
침묵에는 불편한 심기가 배여 있다. “내일이 선거라도 부당하게 공격당하면 반드시 해명할 것이다”라는 것이 그동안 노대통령이 내세운 방침이다. 물론 통합신당과 민주당의 합당 선언을 ‘부당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앞서 11월8일 전남 나주에서 가진 광주·전남 지역 주요 인사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민주당 합당에 대한 반대 입장을 다시 한번 밝혔다.
“우리당 창당을 응원했던 것은 호남 안에서도 경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당 간에 경쟁이 없는 정치는 정치 품질 저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정책적으로 의미 있는 경쟁을 하고 필요하면 제휴와 연대를 하면 된다고 본다. 오로지 지역만을 근거로 해서 단결하게 되면 반드시 반작용을 부르게 되고 영원히 큰 판에서 이길 수 없다.”

측근·고위 관료들의 잇단 잡음도 작용한 듯

더구나 이번 합당 선언은 공론화 절차 없이 양당의 대선 후보와 몇몇 지도부에 의해 전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노대통령과 청와대에 사전 협의는 물론 사후 보고도 없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지난 8월 통합신당과 열린우리당이 합당할 당시 이를 ‘질서 있는 통합’으로 보고 통합신당을 ‘열린우리당을 계승한 정당’으로 평가했었다. 또 정동영 통합신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가 논란이 되자 “우리당을 계승한 당의 경선에서 선출된 후보 외에 지지할 후보가 없다”라고 명확히 했다. 그런 통합신당과 정후보가 ‘지역주의 회귀’에 나섰는데도 노대통령은 특별한 언급 없이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이번 대선 공간에서 노대통령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지적이 우선 제기된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노심’(盧心)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정치권의 관심은 세 번째 도전에 나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권 행보와 BBK 주가 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의 국내 송환에 집중되었다.
이는 ‘친노’(親盧) 세력의 약화와도 맞물려 있다. 당내 경선에서 친노 세력은 사실상 몰락 위기에 내몰렸다. 조직과 여론에서 모두 밀려 결승점을 꼴찌로 통과했다. 후보 단일화만 성사시키면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자만심에 지나지 않았다.
경선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구심점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이해찬 의원이 공동선대위원장, 한명숙·유시민 의원이 가족행복위원장과 국민대통합추진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활동은 제각각이다. 총선에 몰두하는 의원들은 제 갈길이 바쁘다. 노대통령을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형성하던 예전의 ‘친노’를 기대하기는 사실상 힘들어진 상황이다.
지지율 정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동영 후보는 노대통령과의 차별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태세이다. 노대통령과 참여정부에 실망해 등을 돌린 전통적 지지층을 재결집하려면 차별화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는 분위기이다. 경선 직후 “노대통령의 응원을 얻고 싶다”라던 정후보는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노무현 프레임’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강화하는 모습이다. 당내 친노 세력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정치 생명을 걸겠다”라며 민주당과의 합당을 강력히 밀어붙인 것도 결국 ‘정동영 색깔’을 내기 위한 행보로 읽힌다.
임기 후반기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측근들과 고위 관료들의 부패 혐의도 노대통령의 운신을 어렵게 하고 있다. 정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과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이어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비리 혐의로 구속된 가운데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가 ‘삼성 떡값 검사’로 지목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경 유착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청렴한 정부 구현을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로 여겨온 노대통령에게는 뼈아픈 상처가 될 수 있다.
다른 해석도 나온다. 노대통령 스스로 대선 정국의 중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회의적 시각’이 우선 작용한 듯 보인다. 노대통령은 11월11일 방송된 KTV 특집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이 우리 역사를 발전시키는 진보의 계기로 제대로 작용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내다보았다.
“통합적 기능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에 대해 이번 대선 때 상당히 많은 논쟁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 획일주의 정치 문화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타협적 정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가겠다, 이런 논쟁들이 실제로 있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이라는 논쟁이 있어야 하는데, 가치와 전략의 논쟁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버렸다.”

퇴임 후 구상과 연결하는 관측도

방어적 측면도 엿보인다. 3개월 후면 물러나야 할 현재 권력이 향후 5년을 이끌게 될 미래 권력을 놓고 펼치는 대권 경쟁에 잘못 휘말릴 경우 막바지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 최근 들어 노대통령이 참여정부의 핵심 과제 부문에서 가시적 성과물을 내기 위해 고삐를 바짝 조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노대통령은 11월13일 개최된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난 후의 선언은 그저 축배를 들자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지적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종식과 평화 구축’을 위한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 정상의 공동선언을 촉구했다. 앞서 10월31일 경남 진주 혁신도시 기공식에서는 “이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균형발전 정책을 확대하기 어렵다. 확대는커녕 이제는 지키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노대통령의 정치적 침묵을 ‘퇴임 후 구상’과 연결하는 관측도 나온다. 노대통령은 임기를 마친 후 시민주권운동을 위한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KTV와의 인터뷰에서도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항상 실망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하면서 “1퍼센트의 국민이 확고하게 역사의 발전 전략에 대해 전략적 사고를 갖는다면 아마 무서운 힘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민적 주체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이런 정치적 신념을 자주 토로하는 것을 보면 대선을 지나 곧바로 맞이하게 될 총선 국면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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