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 축구’ 용광로 ‘최강 강철’ 낳다
  •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풋볼위클리>편잡장) ()
  • 승인 2007.11.2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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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챔피언 오르기까지 ‘감독의 공’ 눈부셔

 
2007 K리그가 ‘전통 명가’ 포항 스틸러스의 챔피언 등극으로 막을 내렸다. 포항의 드라마틱한 우승이 ‘6강 플레이오프’라는 제도적 장치에 힘입은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전통적인 한국 축구 팬들에게 포항의 우승은 그 자체로 매우 반가운 일이다. 1980~90년대 인기를 몰고 다니던 클럽 포항의 부활이 K리그 부흥의 촉매제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한 까닭이다.
실업 축구팀으로 창단한 197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포항의 역사는 K리그를 대표할 만한 번뜩이는 재능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박성화, 조병득, 최순호, 이흥실, 최상국, 조긍연, 박경훈, 이기근, 박태하, 최문식, 백승철 등이 포항의 스타로서 K리그 무대를 누볐다.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생생한 황선홍-라데-홍명보는 K리그가 낳은 ‘수퍼 트리오’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이언 킹’ 이동국이 포항의 얼굴 역할을 했다.
선수들의 면면과 화려한 축구뿐 아니라, 포항은 한국 축구사에 실로 의미 있는 기념비를 세웠다. 다름 아닌 한국 최초 축구 전용구장인 ‘스틸야드’가 그것이다. 1991 시즌부터 포항의 홈이 된 스틸야드는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한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축구 경기장이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 탄생한 대형 전용구장들이 있지만, 그 어떠한 구장도 프로축구 경기를 벌이기에 안성맞춤인 스틸야드의 매력을 능가하기란 어렵다. 어쩌면 1990년대 포항의 멋진 경기력은 그 ‘매력덩어리 구장’과 그곳을 가득 메운 팬들의 성원으로부터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1986년과 1988년에 이어 1992년 세 번째 K리그 정상에 올랐던 포항은 1997년과 1998년에는 아시아 챔피언스컵을 2연패하고 아시아 최고 클럽의 영예마저 차지했다. 하지만 명가 포항의 기세는 1999년을 기점으로 꺾이기 시작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좋았던 시절의 광채를 대부분 잃어버렸다. 불꽃 같은 축구는 어느덧 소극적인 축구로 바뀌어 있었고, 성적도 ‘기껏해야’ 중위권이었다. 모기업의 지원도 줄었다. 2004년 포항은 전기 리그를 깜짝 우승하면서 12년 만에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만 기쁨도 잠시, 후기리그 꼴찌의 성적표를 받아든 후 챔피언결정전에서 수원을 넘지 못했다. 무엇보다 ‘K리그의 자랑’이던 스틸야드의 함성 소리가 작아졌다. 2000년대 들어 스틸야드에는 실로 꾸준한 관중 감소 추세가 나타났는데, 이는 실로 K리그 전체의 흥행 저하를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만하다.

2005년 파리아스 감독 영입 이후 침체 벗어나

 

바로 이러한 시기에 젊은 세르지오 파리아스가 포항에 도착했다. 채 마흔도 되지 않았던 파리아스는 유럽인을 선호하는 경향의 한국 풍토에서 최초의 브라질 출신 K리그 감독으로 기록된다. 또한 그는 선수 시절 스타로서 커리어를 보낸 유형과도 매우 거리가 멀다.
2005 시즌 파리아스는 1년의 단기 계약으로 포항의 지휘봉을 잡았고 따라서 그에게는 재계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어느 정도의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그러한 부담 속에서도 파리아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포항은 전기 리그 4위, 후기 리그 6위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이는 2004년 포항의 극심한 기복을 감안할 때 충분히 희망적인 성적이었다. 그러나 더욱 고무적이었던 것은 파리아스가 뻗어오르기 시작한 포항의 젊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축구 철학을 ‘연착륙’시켰다는 점이다. 파리아스의 첫 시즌, 포항의 팬들은 틀림없이 ‘희망의 싹’을 목격했다.
파리아스 축구의 핵심 철학은 역시 브라질 출신다운 ‘공격 축구’이다. 적어도 필자의 견해로는 파리아스가 표방하는 축구가 ‘공격 축구’에 대한 올바른 해답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떠한 위치의 선수이든지 간에 항상 공격 전개를 염두에 둔 플레이를 하라’라는 것이다. 이는 미드필더, 수비수, 심지어 골키퍼를 막론하고 플레이 하나하나에 ‘공격’의 의미가 담겨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공격 축구냐 그렇지 않은 축구냐가 결정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백패스를 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무의미한 백패스가 아니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백패스는 ‘공격 축구의 백패스’이다. 이는 무의미한 백패스와 구별되어야만 한다.
파리아스는 포항에 도착한 직후부터 선수들에게 무의미한 백패스, 횡패스를 지양할 것을 주지시켰다. 그리고 언제나 ‘전진’을 염두에 둔 플레이를 펼칠 것을 독려했다. 또한 조직력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개인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주문했다.
브라질산 공격 축구의 철학을 불어넣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파리아스 축구에는 ‘융통성’도 존재했다. 파리아스는 세계 축구의 명백한 트렌드인 ‘4백’을 굳이 고집하지 않았다. ‘3백’이 한국 선수들에게 더 친숙할 뿐 아니라 포항이 보유한 자원들의 성향에 비추어 훨씬 더 적합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또한 한국 선수들과의 호흡이 좋지 않은 브라질 출신 선수들은 과감히 팀에서 도려냈다. 자신이 정한 틀에 무조건 선수들을 끼워 맞추기보다, 한국 축구의 특성과 포항이 지닌 기반을 존중하는 토양 위에 자신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2년째로 접어든 2006 시즌, 파리아스 축구의 위력은 이제 가능성을 넘어 현실성이 되었다. 포항은 전기 리그 2위, 후기 리그 2위라는 호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수원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한 방’을 얻어맞기는 했지만, 시즌 전체를 놓고 볼 때 포항의 매력적인 경기력은 K리그 팬들의 높은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희망차게 출발한 2007 시즌은 이동국의 이탈과 더불어 야기된 ‘최전방 마무리의 부재’로써 얼룩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3년 동안 갈고 닦은 파리아스 축구는 ‘시즌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마침내 빛을 발했다. 포스트시즌을 포함해 최후의 일곱 경기에서 포항의 득점포는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특히 따바레즈의 움직임과 이광재의 공간 침투를 결합시킨 파리아스의 ‘필살기’에 다른 강팀들은 모두 추풍낙엽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수비·미드필드·공격 할 것 없이 포항의 선수들은 수원이나 성남의 선수들보다 더 영리했으며 더 공격적이었다. 일관된 기조 아래 팀을 성장시켜온 젊은 브라질 감독은 이로써 그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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