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같은 결론, 불 같은 후폭풍
  • 감명국·김지영 기자 ()
  • 승인 2007.12.1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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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등 강력 반발, 국민 다수도 “신뢰 못해”…새로운 의혹 둘러싼 ‘4대 쟁점’ 남아

 
'BBK 의혹’이 검찰의 12월5일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냈다. 검찰은 비교적 분명하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옵셔널벤처스(BBK의 후신) 주가 조작에 개입한 혐의도 없고, BBK와 (주)다스의 실소유주라는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라며 모두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이같은 명확한 결론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정치권은 요동쳤다. 심지어 한나라당과 검찰 주변에서조차 “이 정도의 수위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라고 놀라워할 정도이다.
하지만 검찰의 명쾌한 발표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여전히 12월의 칼바람을 타고 더 매섭게 퍼져가고 있다. 검찰 발표 직후 각 언론사가 일제히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한결같이 ‘검찰 수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응답이 ‘신뢰한다’는 응답보다 높게 나타났다. ‘특검이 필요하다’는 응답 역시 ‘필요없다’는 응답을 앞질렀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검찰이 자신감 있게 결과물을 내놓았지만, “완벽한 수사로 보기 어렵다”라는 법조계의 비판적 시각이 표출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명쾌한 결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다소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1. 검찰은 왜 그렇게 확신에 찬 결론 냈나

“인상 좀 펴고 합시다.” BBK 수사 결과를 놓고 검찰과 취재진의 치열한 일문일답이 이어지던 서울중앙지검 브리핑실 내부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최재경 특수1부장(특별수사팀장)이 김홍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을 대신해 답변에 나서면서 취재진에게 웃으며 던진 첫마디였다. 예상 외로 ‘이후보 무혐의’라는 확신에 찬 수사 결과가 발표되자 취재진들도 검찰이 그런 자신감을 보인 배경에 의문을 표시하고 나선 데 대한 반응이었다. 최부장은 “기자들의 의혹 제기를 이해한다. 우리도 그와 똑같은 의심을 품고 수사에 임했다. 정말 여기 배석한 열한 명의 검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하지만 이후보와 관련된 것은 어느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라며 무혐의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무혐의 결정에 대한 법조계의 해석은 다소 엇갈린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예를 들어 A씨가 한 사건에 연루된 의혹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검찰이 ‘있다’는 점을 입증하려면 관련 증거 자료를 찾으면 된다. 반면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면 자연히 연루 의혹은 ‘없다’로 결정되는 것이다. 즉 무혐의 처리가 된다. 일각에서는 연루 의혹이 없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연루 의혹이 없음을 입증하는 그런 증거 자료란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BBK 수사 또한 이후보의 연루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당연히 무혐의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반면 민변 출신의 또 다른 변호사는 “법리상 딱히 적용되는 죄목이 없을 경우도 무혐의이고,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없을 경우에도 결국 무혐의이다. 검찰은 혐의를 입증해서 기소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 기본 소임인 만큼 이후보의 관련 혐의를 찾으려고 다방면으로 수사했으나 증거를 찾지 못했다면 당연히 무혐의 결정이 맞다. 그런 측면에서 주가 조작 혐의에 대해서는 현 수사 결과로 볼 때 무혐의로 판단된다고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BBK와 다스의 실소유주 의혹은 또 다른 접근법으로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까지 명쾌하게 드러나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무혐의라거나 관계 없다고 결정짓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검찰이 상당한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무혐의라는 확신에 찬 결론을 낸 것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게 제기되는 이유는 지난 8월 검찰이 이후보의 차명 재산 보유 의혹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 발표 때 혹독한 비난에 직면했던 점을 꼽고 있다. 당시 검찰은 “제3자의 소유로 보인다”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정치권의 비난은 물론, 검찰 내부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당시 수사팀 역시 최부장이 이끌었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였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실제 8월의 발표 때 일선 검사의 수사 결과와는 달리 상당히 애매한 발표를 내놓는 바람에 검찰 내에서는 ‘전혀 검찰답지 않은 발표였다’라는 내부 비판이 많았다. 수뇌부에서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냐는 검사들의 반발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사팀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됐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2. 범여권의 특검 요구가 수사 결과에 영향 미쳤나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가 발표되기 1주일 전인 11월 말부터 정치권에서는 ‘BBK 특검’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만약 검찰 수사가 미진하면 특검을 통해서라도 밝혀야 한다”라는 주장이었다. 
검찰측은 정치권의 특검 거론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일선 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검찰 수사가 자기 당의 입맛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특검으로 간다면 검찰 존립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나. 아예 처음부터 특검에다 맡기든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난 8월의 수사 발표는 정말 부끄러운 것이었다. 검찰이 자꾸 정치적 고려를 해서는 안 된다. 뒷말이 안 나오려면 그야말로 정확히 법리주의에 입각해서 우리가 밝힌 증거 자료가 있으면 밝히면 되고,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특별수사팀의 면면은 나도 잘 아는데, 그들은 정말 대한민국 최고의 베테랑 검사들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수사를 다 했다는 자신감이 없고서야 그런 결과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수사 도중에 불거진 특검론이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수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 청사 밖에서 특검이 거론되면 수사하는 일선 검사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맥 빠지고 불쾌해진다. 특검을 빌미로 검찰을 정치적으로 예속시키려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만약 수사 결과를 애매모호하게 발표했을 때 오히려 정치권에 특검의 빌미만 제공하고 검찰의 무능함과 한계를 노출시킬 뿐이라는 강경 목소리가 검찰 내부에서 충분히 나왔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수사만큼은 무조건 결론을 내자고 검사들이 똘똘 뭉쳤을 수도 있다”라고 추정했다.
검찰이 수사 발표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나온 일부 부적절한 답변이 특검의 추가 수사 여지를 남겼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됐던 이후보의 인터뷰와 명함에 대해서 질문이 이어지자 김홍일 차장은 “이미 김씨의 진술과 한글계약서 위조 사실로 BBK 소유주가 김씨임이 드러났는데, 그런 것을 따로 수사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3. 에리카 김은 왜 검찰 수사 결과에 반박하지 않았나

에리카 김은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직후 “수사 결과가 예상한 대로 나왔다”라며 크게 당혹스러워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검찰 수사 결과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할 만한 증거와 자료를 기자회견에서 제시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지난 12월6일로 예정되었던 반박 기자회견은 갑자기 취소되었고, 에리카 김을 비롯한 가족들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김경준씨의 변호인인 오재원 변호사도 “기자회견을 왜 취소했는지 모른다”라고만 말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이 취소되자, 그 배경을 놓고 갖가지 추측이 무성하게 나돌았다. 우선 에리카 김이 몸을 잔뜩 낮추기로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우세했다. 검찰이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기소 중지된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 사법 당국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이 아니냐는 추론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계속해서 한국 검찰을 자극할 경우 자칫 구속된 김경준씨의 형량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했을 수도 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몸을 낮추었다가 향후 진행될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대응해나가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을 법도 하다.
일각에서는 자신감에 넘쳤던 에리카 김에게 수사 결과를 뒤집을 만한 카드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에리카 김이 이미 검찰의 수사 결과 내용을 “예상한 대로 나왔다”라고 말한 만큼 당분간 숨고르기를 하다가 취소된 기자회견에서 내놓기로 했던 추가 증거와 자료를 제시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4. 검찰이 말한 모방 범죄의 진실은 무엇인가

검찰은 BBK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던 기자회견장에서 뜬금없이 2000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보일러 룸

 
(Boiler Room)>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보일러 룸’은 주식 사기 조직을 일컫는 미국의 속어. 검찰이 느닷없이 영화 얘기를 들고 나온 것은 김경준씨가 이 영화를 모방한 것 같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를 수사했던 최성환 검사는 “영화 <보일러 룸>을 보면 주가 조작 수법이 김씨가 옵셔널벤처스의 주가를 조작했던 수법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고 직접 영화를 보면 BBK 사건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 실제로 영화 내용도 검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와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검찰이 김씨가 이 영화를 모방했다고 ‘심증’을 갖고 있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영화 줄거리가 유사할 뿐만 아니라 김씨가 세웠던 유령회사(메드 패턴트 테크놀로지)와 대표이사(지오바니 리비시) 이름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가 조작 유령회사와 주인공의 실제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 여기에 김씨는 2001년 8월 ‘지오바니 리비시’라는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 2001년 12월 주가 조작 사실이 드러난 김씨가 미국으로 도피한 뒤 옵셔널벤처스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다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이 영화 DVD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한나라당도 지난 10월께 “김씨의 주가 조작 수법과 영화 <보일러 룸>의 내용이 유사하다”라며 김씨의 단독 범행을 주장한 바 있다. 검찰과 한나라당이 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거론하면서 김씨의 모방 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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