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후손들의 어이없는 역습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 승인 2007.12.1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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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환수에 맞서 줄소송…일부는 “오히려 독립운동 했다” 강변도

 
친일파 후손들이 저항에 나섰다. 정부가 친일파들의 재산 환수에 나서자 집단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역사를 거꾸로 해석했다. 자신의 선조는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어디에서도 친일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오히려 재산을 내줄 수 없다며 강하게 맞서고 있다.
정부는 2005년 12월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대통령 직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까지 발족시켰다.
친일 재산 환수 대상은 1904년 러·일전쟁 때부터 1945년 8월15일 광복일까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해 본인 명의로 남아 있거나 후손이 상속을 받아 소유하고 있는 토지이다.
지난 5월 재산 환수 결정이 내려진 이후 친일파 후손들은 크고 작은 저항을 해왔다.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친일파 후손들이 친일재산조사위를 상대로 낸 국가 귀속 청구 소송은 총 5건. 민영휘와 민상호 후손들이 각각 1건, 민병석 후손들이 3건이다.
특히 민영휘의 후손 등 25명은 집단소송을 냈다. 친일파 송종헌의 후손으로부터 토지를 매수한 사람이 행정소송을 낸 경우도 있다. 조중응의 후손과 이재곤의 후손이 행정심판 1건씩을 제기했다. 조중응의 후손은 위원회가 국가 귀속으로 결정한 재산이 ‘선산’으로서 개인 재산임을 주장했으나 기각되었다.

민영휘 후손들이 행정소송 주도

행정소송은 민씨들이 주도하고 있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산23 등 임야 10필지(43만1천2백51㎡). 시가 1백10억원이 넘는 땅이다. 이 땅의 소유주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거주하는 민 아무개씨(56). 민씨는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하사받고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 민상호(1870년 6월3일~1933년 9월5일)의 후손이다. 민씨는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민상호의 친일 행적을 적극 두둔하기까지 했다.
그는 소장에서 “한·일 합병 이후에는 정부 요직에 나가지 않았고, 특별히 친일파적 행동이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종형제인 민제호와 민필호 등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중국으로 망명하였을 때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고, 암암리에 그들에게 국내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바 있다”라고 강조했다. 민상호는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인데 땅까지 내놓으라는 것은 억울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또 일제에 소극적으로 협조했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파들과는 구분해달라고까지 호소했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민영휘(1852년 5월15일~1935년 12월5일)의 후손들도 친일 재산 환수 결정에 불복하고 나섰다. 이번에 재산조사위의 환수 대상이 된 땅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28-1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능원리 321번지의 임야 등 48필지(31만7천6백32㎡)이다. 시가로 따지면 71억원에 달한다.
청주시 상당구 토지는 민영휘가 일제로부터 받은 뒤 아들·손자 등에게 증여하면서 상속이 이어졌다. 용인시의 땅도 마찬가지이다. 민영휘의 후손인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사는 민 아무개씨(52) 등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민영휘의 후손들도 선조의 친일 행적을 강하게 부정했다. 오히려 친일 행적을 합리화하고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였다”라고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소장에서 “민영휘는 휘문의숙을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등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또 “민영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한·일합병이 된 이후 국내와 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민영휘가 자작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고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친일 재산 환수 위한 특별법은 위헌” 주장

민영휘는 일제가 고종의 퇴위를 강요할 때 양위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또한 친일 단체인 신사회 위원장, 신궁봉경회 찬성장, 조선실업구락부 고문 등으로 활동하는 등 한·일 합병과 일제 식민 통치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이러한 공으로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 은배·금배 등을 받으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조선 최고의 부자로 꼽혔던 인물이기도 하다. ‘고금 몇 백년 내에 처음 보는 큰 부자’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한때 재산 규모가 8천억원(금값 기준 현 시가) 정도였지만, 사망 시점인 1935년에는 4천2백억원이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친일재산조사위에 따르면 민영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모았다. 한·일 합병의 공으로 받은 은사금 외에 권력과 관권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축재했다고 한다. 민영휘는 축재한 재산을 자신의 명의로 하지 않고, 민대식·민규식 등 아들의 이름으로 올렸다.
그나마 민병석(1858년 12월12일~1940년 8월6일)의 후손은 선조의 친일 행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서울시 도봉구에 거주하는 민병석의 증손자 민 아무개씨도 재산조사위의 재산 환수 조치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이번 환수 대상에 포함된 토지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 구계리 204의 27의 7필지(1만2천7백88㎡)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설문동 699의 15 등 3필지(1천8백48㎡)이다. 전체 10필지(1만4천6백36㎡), 시가 10억원가량의 규모이다.
민씨는 이 중 고양시 일산 동구 설문동 699의 15의 토지를 문제 삼았다. 이 토지는 민병석이 적법하게 매수한 것으로 추정되며 친일 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병석도 대표적인 친일파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일 합병 당시 궁내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조약 체결에 가담했다.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다. 
민상호·민영휘·민병도의 후손들은 한결같이 친일 재산 관련 특별법 자체가 위헌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들은 소장에서 “특별법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소급 입법 금지의 원칙과 연좌제 금지 등에 어긋나 위헌이므로 이같은 위헌 법률에 근거한 재산 환수 결정은 취소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조사 개시에 앞서 미리 땅 팔아치우기도

친일재산조사위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장완익 사무처장은 “위원회는 이제 출발선을 조금 넘은 단계이다. 앞으로 여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재산 조사는 물론 특별법에 따른 조사 대상자의 추가 선정, 당사자로부터 제기되는 이의신청과 법적 쟁송에의 대응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라고 말했다.

 

친일재산조사위의 국가 귀속 결정에 이의가 있는 당사자는 행정심판 또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 경우 친일재산조사위에서는 60일 이내에 재결정한다.
일부 친일파 후손들은 재산 환수를 피하기 위해 땅을 팔아치우기까지 했다. 특별법 시행 후에도 해당 토지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이 나오기 전에는 매매 금지 등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하지만 특별법 시행 이후에 매매된 땅은 소유권 등기를 마치더라도 매매 행위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 결국 땅을 산 제3자만 피해를 보게 된다.
지금까지 제3자에게 팔아넘긴 뒤 국가 귀속 결정이 내려진 땅은 15필지(2만4천6백64㎡)에 이른다.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 송 아무개씨(62)는 강원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8필지(2천8백71㎡), 공시지가 4천5백만원 상당의 토지를 1993년 국가 상대 소송에서 이겨 되찾은 뒤 2005년 12월30일 제3자에게 팔아넘겼다.
고희경의 후손도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석장리 5필지(1만7천2백48㎡), 공시 지가 1억7천만원어치 토지를 지난해 8월에 팔았다. 민병석의 증손자 민 아무개씨는 일산동구 설문동 3필지(1천8백48㎡)를 지난해 9월5일 박 아무개씨(55)에게 팔아넘겼다. 제3자가 매입한 땅 가운데 아직 국가 귀속 결정이 나지 않았지만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땅에는 민영휘·박필병 등의 후손들이 매각한 것도 있다.
광복회와 대한민국독립유공자유족회 등 민족 단체들은 친일파 후손들에게 소송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성명서를 내고 “친일을 통해 만들어진 재산이 국가에 환수되는 것은 당연하다. 친일 민족반역자 후손들은 그 이름만큼이나 부끄러운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고 선조들의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비도덕적인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줄 아는 양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상들보다 더 부끄럽고 추악한 후손이 될 것이다”라고 성토했다.
친일재산조사위는 지금까지 3차에 걸쳐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22명의 토지 5백43필지(3백29만3천6백10㎡)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시가로 따지면 7백30억원에 달한다. 또 친일반민족행위자 1백26명의 2천5백13필지(1천3백99㎡), 공시지가 1천1백1억원 상당의 토지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 후 관할 법원에 보전 처분을 신청했다.
지금까지 조사 개시 결정에 이의신청을 낸 친일파 후손들은 81명(66.4%)이다. 친일파 후손 10명 중 6명은 재산조사위 결정에 불복하고 있는 셈이다. 조사위에 접수된 3백20건의 이의신청 유형을 보면 친일파 후손들의 역사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의신청 사유를 보면 ‘조사 대상자는 친일 행위자가 아니고 대상 재산도 친일 재산이 아니다’(42%), ‘조사 개시 대상 재산이 친일 재산이 아니다’(39%), ‘선의의 제3자라는 주장’(12%), ‘자신들의 선대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7%), ‘기타’(1%)이다. 앞으로 친일파 후손들이 친일 재산 환수 결정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을 잇달아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완용 재산은 현금·예금 등이어서 환수에 어려움

 
그러나 이번에 국가 귀속이 결정된 재산은 친일파들이 친일 대가로 획득한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이완용은 친일파의 거두답게 일제로부터 많은 재물과 토지를 하사받았다. 한·일 합병에 대한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은사공채 15만원(현재 금값기준 약 30억원)을 받았다. 1910년대 토지와 임야 사정 당시 보유 면적이 확인된 것만 해도 여의도 면적의 1.9배에 달하는 1천3백여 필지, 1천6백만㎡를 소유했다. 그런데도 이번에 국가 귀속이 된 땅은 고작 16필지(1만9백28㎡)에 불과하다.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받은 토지를 5년 내에 거의 대부분(98%)을 매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토지를 다시 매입하지 않고 대부분 현금과 예금으로 보유했다.
송병준도 이완용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재산을 축적했다. 송병준은 일제 초기 총 5백70필지(8백57만㎡), 즉 여의도 면적 크기의 토지와 임야를 보유했다. 그러나 송병준이 사망한 후 대부분의 토지가 흥청망청 탕진되어 제3자에게 매각되었다.
‘친일파 자손은 3대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가 자손은 3대가 고통받는다’는 말이 있다. 친일파들은 친일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작위와 함께 엄청난 토지를 하사받았다.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보장받은 셈이다. 실제로 친일파의 자손들은 부를 누리며 상류층의 삶을 살았다. 반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는 가난과 고통의 대물림이 계속되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대가가 가난의 대물림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뒤늦게나마 친일파들의 재산 환수에 나섰다. 국가 귀속이 결정된 친일 재산은 특별법 제25조에 따라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의 예우를 위한 지원금 또는 독립운동 관련 기념 사업 등에 우선적으로 사용된다. 친일재산조사위는 앞으로도 조사 결과에 따라 지속적으로 친일 재산의 국가 귀속을 추진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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