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일격’에 회심의 개혁 흔들리나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 승인 2007.12.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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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안이 부결되면서 곤경에 빠진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연임은 가능할까.

지난 12월10일 아르헨티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츠네르 대통령 취임식에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나타났다. 그는 “이제부터 남미 국가들이 미국의 달러 빚을 쓴다는 것은 정말 바보스러운 짓이다”라며 이날 창설된 남미은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여전히 거침없는 언변을 과시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베네수엘라의 신사회주의 국가 개혁’을 표방하며 제안한 개헌안이 지난 12월2일 실시된 베네수엘라 국민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반대 50.7%, 찬성 49.3%)로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베네수엘라 국민투표는 반미의 대표 주자인 차베스 대통령의 영구 집권 계획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 때문에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개헌안에는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7년으로 연장하고 대통령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서방 언론은 이번 개헌안 부결을 “차베스의 독재 계획이 무너지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살아났다”라고 평가하면서 환호하는 반(反)차베스 진영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AFP 통신은 베네수엘라 취재원의 말을 빌려 “빈곤층이 차베스 대통령의 지나친 개혁이나 권력 집중을 염려하기 시작한 결과이다”라고 전했다.

반차베스 전선 구축한 민간 미디어들 “개헌 시도하는 쿠데타”

 
차베스가 개헌안을 제기했을 무렵 반차베스 진영이 다수를 차지하는 민간 매스미디어들은 이구동성으로 헌법 개정안을 비난했다. 이번 개헌 시도를 놓고 ‘쿠데타’라고 말하기도 했다. 카톨릭계의 지도부, 경제계 인사, 지방 자치를 책임지는 주지사, 대학생 등도 거들었다. 야당은 광범위한 반차베스 전선을 구축해 강도 높게 비난했다. 베네수엘라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이들 세력은 연일 개헌 반대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차베스 대통령을 공격했다.
미국 빙햄튼 대학 제임스 페트라스 교수(사회학)는 “베네수엘라 기득권층이 저항하는 것은 대통령 임기 연장이나 연임 제한 철폐 조항 때문이 아니라 다른 조항들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개헌을 위해 33개 조항을 제출했는데 대통령제에 관한 조항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개헌안을 살펴보면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상당히 이로운 조항들이 많다. 노동 시간을 하루 여섯 시간 단축하고 투표 연령을 실질적인 노동 연령대인 16세로 낮추며 이권 정치가 만연한 주 정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해 현지 주민들로 이루어진 ‘지역 주민위원회’에게 의사결정권을 주는 조항 등이 들어 있다. 페트라스 교수는 “기득권층의 저항이 심했던 이유는 개헌안이 통과될 경우 그들의 이익을 대부분 노동자 계급에 양도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베네수엘라의 기득권층은 민간 언론과 서방 언론의 힘을 업고 차베스의 개헌을 ‘독재’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적인 반체제파’로 그려냈다. 차베스의 사회 개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주변국의 진보 세력 중 일부는 이번 개헌을 대통령제에 초점을 맞춰 비난했다. 지난 11월에 멕시코의 진보적 일간지 라호르나다는 “학생들이 차베스 때문에 시위를 할 수밖에 없다”라고 정부를 비난한 대학 경영진들의 인터뷰를 내보내며 반차베스파의 여론조사를 반복해 보도했다.
많은 이들은 개헌안이 부결된 것은 베네수엘라 기득권층의 승리이자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해온 차베스 대통령에게는 큰 상처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가 2013년 1월에 임기가 끝나면 대통령직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선거 결과를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반차베스파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빙의 차이로 개헌안이 부결되었다는 점에서 절반에 가까운 유권자들은 확고한 차베스 지지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4년 8월 대통령 탄핵 투표 때부터 베네수엘라 정치를 취재해온 캐나다의 저스틴 포두르 기자는 “찬반의 근소한 차이와 함께 고작 56%에 불과한 낮은 투표율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유권자 절반은 차베스 지지파

투표율이 낮은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여론조사에서 개헌 찬성이 계속 우위를 보이자 차베스 진영이 방심해 유권자들을 투표 장소로 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반차베스 진영과의 싸움에서 계속 승리하자 친차베스 진영의 활동가들이 방심했다는 반성이 현지에서 나오고 있다. 또 지난 대통령 탄핵 때와는 다르게 이번 투표를 바라보는 차베스 지지 세력은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표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반대로 반차베스 진영은 무척 급박했기 때문에 투표소로 총출동할 수 있었다.
포두르의 설명에 따르면 지난 2004년 탄핵 투표를 포함한 과거 몇 년간의 투표 행태를 보면 약 5백만명이

 
차베스에게 표를 던지고 3백50만명이 반대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국민투표에서는 약 50만명의 유권자가 태도를 바꾸어 차베스에게 반대 표를 던졌다. 계산해보면 찬성 표가 4백50만 표, 반대 표가 4백만 표였지만(실제 반대 표는 조금 더 많았다) 찬성 표의 상당수가 투표를 하지 않아 차베스가 패배했다는 분석이다. 만약 투표율이 조금 더 높았다면 개헌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이번 국민투표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패배했지만 그의 사회주의 개혁이 멈출 것 같지는 않다. 과반이 넘는 지지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투표에 참여하는 과반수의 찬성 세력 외에도 2백50만명에 달하는 극빈층과 원주민들은 차베스에 열렬히 환호하고 있다. 차베스의 개혁에 대한 지지는 국민투표의 찬성표 보다 월등히 높다. 차베스 정부가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얻은 재정을 빈곤층을 위한 전력 공급, 건강센터 설립, 교육 시설 확대에 써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당장 차베스 대통령에게 닥친 문제는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개혁을 위해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남은 임기 내에 자신의 연임을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개헌안을 수정해 다시 제출하는 것이다. 물론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아니면 2013년 임기가 만료된 이후 자신의 계승자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준 뒤 다시 도전하는 방법이 있다. 헌법과 국민투표의 결과를 존중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 있지만 대통령직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 큰 문제는 남은 기간 동안 반차베스 세력의 탄환을 막는 일이 될 것 같다. 2006년 5월 방송 재허가가 거부되어 폐쇄된 베네수엘라 최대 민간 방송인 RCTV는 지난 2002년 4월 차베스를 축출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베네수엘라 기득권층을 대변하며 쿠데타를 옹호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방송이 극단적으로 정치에 이용되는 것이 베네수엘라에서는 가능하다. 제임스 페트라스 교수는 “권위주의자로 묘사되는 차베스는 오히려 민주적인 절차를 잘 따르는 반면 반차베스 진영은 특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쿠데타, 탄핵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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