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보면 ‘확’ 보인다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7.12.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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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 회화의 대가 ‘정상화’전 / 빛과 사색으로의 초대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요즘 ‘도대체 텅 빈 화면에 점 하나만 찍혀 있는 그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또 그런 작품이 왜 그렇게 비싸냐’고 자주 묻는다. 삼성 리움 미술관 소장 작품들 가운데 도널드 저드나 댄 플래빈 작품을 비롯한 고가의 미니멀리즘 작품들이 많다는 사실은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 미술 경매에서 총액 1위를 재일 한국인 작가 이우환이 차지하자 일반인들의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커다란 캔버스에 점 한두 개 찍힌 그림이 몇 억원씩 호가되는 현실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해 보인다.
사실 작품성과 시장 가격이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텅 빈 화면에 점 하나 달랑 찍혀 있는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양식은 미국에서 1960년대 말부터 나타난 미술 사조 중 하나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을 절제하고 최소화한다는 미학적 입장은 나름대로 미술사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전후 1950년대부터 내면에 억압된 에너지를 쏟아내는 듯한 우연적이고 행위적인 양상을 드러내는 추상표현주의와 갖가지 예술적 제스처들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자 반성적 경향으로 나타난 흐름을 묶어 미니멀리즘이라 부른다.

미국의 미니멀리즘이 한국에서 모노크롬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70~1980년대에 들어 주로 회화 작가들을 중심으로 색이 극도로 절제된 단색화 ‘모노크롬’이라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미술사에서는 보통 미국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미국 미술로부터 동기 유발이 이루어졌을망정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현대미술을 모색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일본에서는 이우환, 국내에서는 박서보, 하종현, 윤명로, 정창섭, 정상화 등의 작가들이 바로 이런 관점에서 상당수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은 바 있다.
양자가 공히 절제적 미의식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미학적 배경과 동기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미니멀아트가 다분히 구조적이고 탈장르적인 양상으로 나갔다면, 한국의 모노크롬은 대체로 노장 사상과 같은 동양 미학에 바탕을 둔 ‘무위자연’ 혹은 ‘비움’의 추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의 모노크롬도 작가들마다 개성이 뚜렷해 하나로 묶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미술 상황은 1980~ 1990년대 거대한 해일처럼 일어난 현실주의 운동에 의해 모노크롬이 모더니즘의 대표적 양식으로 매도되면서 개별 작가들의 차이나 특징은 간과되고, 그저 하나의 괄호 안에 묶이는 상태로 기술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무튼 섬세하고도 미세한 화면 형식과 재료에 숨어 있는 미적 요소들을 은밀하고도 절묘하게 끄집어내는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예술적 평가는 많이 엇갈리고는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들의 영향력은 상당하며,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들 대부분이 이들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홍라희 관장이 미니멀아트를 좋아한다고 하여 우리 미술 시장이 고평가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기는 하나, 역으로 세계 미술 시장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미니멀리즘의 위력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 접어들어 대립적인 근대적 문화 질서를 청산하고 절충적인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을 모색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던의 기치 아래 미니멀리즘은 퇴조하는 듯했다. 하지만 의외로 미니멀리즘은 그 양식적 생명력이 강하게 영위되고 있다.
1970~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정치적 불안기를 맞아 현실주의 미술 진영에 의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들의 다원주의적 포스트모던의 격랑 속에 침몰할 것으로 보였던 미니멀리즘은 서구에서나 한국, 어디서든 예상과 달리 강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서 모노크롬 회화와 같은 절제된 회화 양식은 오히려 발랄하기는 하나 산만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젊은 세대들의 문화적 트렌드에 대한 대항적 양식으로 위상을 굳혀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최근의 많은 전시들이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열리고 있다.
서울 사간동의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정상화’전(11.28~12.24)도 그중의 하나이다. 정상화는 한국의 미적 정체성을 성찰하는 모노크롬 회화의 한 축을 맡았던 작가이다. 특히 작가는 국내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일본과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원형적 미의식을 객체화시켜 성찰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창작 방법을 진지하게 탐구해온 원로이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그림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정적이 감도는 분위기의 잿빛 화면들이나, 색이 있다 해도 단조로운 기하학적 패턴들만이 옅게 드러나는 단색의 화면들이다. 이런 그림들을 미술인들은 익히 경험해왔으나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조금 싱겁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약간의 감수성과 집중력을 갖고 접근해 들어가면 작가의 작품은 독특한 아우라(aura)로서 무언가 심연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고 있는 바를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포착할 수 있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관객들의 해석적 참여를 높이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작품을 보면 마치 창호지로 잘 만들어진 우리 전통 창이나 문을 연상시켜주고 있다. 작가는 화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몇 겹의 칠하기를 반복한다거나, 데콜라지라는 부분적으로 오려내는 방법, 또 다시 칠하는 등의 반복을 거듭한다. 여러 차례 다른 안료나 재질의 층을 통해 다른 명도나 투명도를 얻음으로써, 그림은 빛에 따라 단조로우면서도 미세한 변화와 율동이 연출되는 문의 모습으로 지각된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만들어나가는 화면은 어느새 우리를 빛과 사색의 공간, 어딘지 모르게 엄숙하고 경건한 환영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유형의 작품들은 역시 미세한 형식의 변화 속에 은폐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섬세한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 3국 가운데서도 한국 미술이 가장 풍부한 뉘앙스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감수성을 공동체가 선천적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언어에서 형용사나 부사가 풍부한 것과 같다. 맛에 대한 반응을 표현할 때도 얼마나 많은 형용사와 부사가 동원되고 있는가. 그와 같이 뉘앙스가 풍부한 언어 환경이 그대로 조형 언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작품 세계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작품의 이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작품들을 언어로 다 해석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작가들의 절제는 바로 관객의 참여라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작품들도 작가 의도만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들의 작품은 작가 의도 속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관객의 참여와 반응, 해석, 교감 등의 독자 행동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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