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병 앓는 ‘축구 종가’ 이 없으면 ‘잇몸’이다
  •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풋볼위클리> 편집장) ()
  • 승인 2007.12.2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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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 파비오 카펠로 감독, 잉글랜드 대표팀 사령탑 맡아

 
2008 유럽선수권(이하 유로)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게 된 ‘축구 종가’ 잉글랜드가 다시 한 번 외국인 감독을 맞아들였다. 주인공은 이탈리아인 파비오 카펠로. 잉글랜드 대표팀이 앓고 있는 ‘중병’은 무엇이며 최정상 반열의 명장 카펠로는 과연 구겨진 자존심의 종가에 새 희망을 던져줄 수 있을까?
AC밀란 두 차례, 레알 마드리드 두 차례, 그리고 AS로마와 유벤투스의 감독을 거치며 무수히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파비오 카펠로가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자신들의 축구사에 또 한 차례 오점을 남긴 잉글랜드는 결국 이번에도 ‘외국인’의 손에 명가 재건의 희망을 걸게 됐다. 다른 후보였던 조세 무리뉴가 어쩌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 카펠로는 지금의 잉글랜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선택이다. 그리고 적어도 어떤 부문들에서 카펠로는 무리뉴에 비해 나은 측면들을 지닌다.

‘무수한 트로피’ 자랑하는 최정상급 지도자

우선 지구촌을 통틀어 카펠로의 클럽 기록을 확실하게 능가하는 축구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필자에게 1990년대 이래 유럽 축구의 ‘3대 감독’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필자는 주저없이 파비오 카펠로와 지오바니 트라파토니, 그리고 알렉스 퍼거슨이라고 대답한다. 오트마 히츠펠트와 마르첼로 리피, 그리고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나 아르센 벵거, 거스 히딩크와 조세 무리뉴도 존재하지만, ‘트라파토니-퍼거슨-카펠로’의 3대 라인업은 충분히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잉글랜드는 ‘빛나는 경력’ ‘풍부한 경험’ ‘거대한 이름’의 차원에서 최정상급의 인물을 맞아들였음에 틀림이 없으며, 따라서 잉글랜드 대표팀을 구성하는 이른바 스타 선수들도 카펠로를 이전의 스티브 맥클라렌과 동급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명망으로부터 비롯하는 ‘거대한 존재감’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카펠로의 커리어가 말해주는 두드러진 특성들 가운데는 잉글랜드의 고질병을 고쳐나가기에 매우 적합한 것들이 많다. ‘전술적 역량’은 물론이거니와 ‘카리스마’, ‘엄격함’, 때로는 지나치리만치 냉혹하게 느껴지는 카펠로의 ‘승부 지상주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실로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그들의 뇌리에는 일종의 ‘패배주의’가 존재한다. 이는 중요한 승부처에서 한결같이 고비를 넘지 못했던 그들의 축구사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는 1990 이탈리아월드컵(준결승전·대서독), 유로 1996(준결승전·대독일), 1998 프랑스월드컵(16강전·대아르헨티나), 유로 2004(8강전·대포르투갈), 그리고 2006 독일월드컵(8강전·대 포르투갈)에 이르는 여정에서 연이은 ‘승부차기 패’를 당했다. 이처럼 누적된 실패의 역사는 잉글랜드 선수들로 하여금 경기가 풀리지 않을수록 “오늘도 결국 어렵겠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페널티킥이나 승부차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잉글랜드 선수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역력하다. 잉글랜드 골키퍼들의 ‘실수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도 어쩌면 동일한 맥락이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중요한 승부에서 경기를 뒤집기 위한 모험에 나서기보다 소극적 플레이를 펼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런 소극적 자세는 오히려 더 많은 실수를 불러온다. 이는 설사 경기가 불리하더라도 “그래도 마지막에는 우리가 이긴다”라는 자신감을 지닌 다른 강팀들에 비해 커다란 핸디캡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잉글랜드 팀에게는 카펠로의 트레이드마크인 ‘승부사 기질’과 트로피 획득의 풍부한 경험이 정말로 필요하다.
심리적 핸디캡의 문제를 떠나, 현실적 전력의 측면에서도 잉글랜드는 언론들의 ‘시끌벅적함’만큼의 최정상급 팀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잉글랜드 대표팀을 구성하는 대다수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현재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축구 리그-에서 억대의 주급을 수령하고 있으며 각자의 소속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잉글랜드의 실체는 그리 견고하지 않다.
물론 잉글랜드 선수들은 각자의 클럽에서 중요하다. 웨인 루니,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나 존 테리가 모두 그러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외국인 동료들과의 조화 안에서만 그러하다. 그러면 잉글랜드 선수들만을 차출해 대표팀을 구성했을 때는 어떨까?

스타 많아도 모든 포지션 충족 못 시켜

 
바로 여기에 잉글랜드의 깊은 고민이 존재한다. 제라드와 램파드를 미드필드에 위치시키는 문제는 스벤 요란 에릭슨 감독 시절부터 전해내려온 잉글랜드의 ‘해묵은 딜레마’였다. 비단 제라드와 램파드뿐 아니라 잉글랜드에는 스코트 파커(웨스트 햄)로부터 신예 마이클 존슨(맨체스터 시티)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유형’의 중앙 미드필더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클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문제는 잉글랜드 대표팀은 이들 모두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면 잉글랜드는 루니와 조 콜, 그리고 아론 레넌 정도를 제외하고는 ‘볼을 몰고 달릴 수 있는’ 부류의 공격 자원이 없다. 즉 각 클럽의 개별적 잉글랜드 선수들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지만, 동시에 잉글랜드는 ‘전체적인 팀’의 견지에서 조화롭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포지션에서 ‘선수층’이 두텁지도 않다. 유로 2008 지역 예선에서 마이클 오웬이 또다시 부상으로 쓰러지자 포워드진 약세를 면치 못했던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이렇듯 잉글랜드가 모든 면에서 최정상급인 팀이 아니기에 팀을 이끄는 감독의 역할은 더더욱 중요해진다. 변수가 많은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팀들의 공통점은 감독이 팀의 능력을 ‘1백20%’ 끌어낸다는 데 있다. 유능한 감독은 자신의 팀이 지닌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반면, 상대의 단점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것에 포인트를 맞춘다. 그리고 어쩌면 카펠로야말로 바로 이러한 작업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그 어떠한 고액 주급의 스타도 자신의 팀을 만들기 위한 카펠로의 ‘살생부’를 피해갈 수는 없다. 카펠로는 그의 지도자 커리어를 통해 프란체스코 토티, 파올로 디 카니오,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 안토니오 카사노, 호나우두, 그리고 데이비드 베컴 같은 선수들과의 ‘정면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많은 축구 천재들을 제자로 거느렸던 카펠로가 지금의 잉글랜드 선수들 정도에게 철퇴를 날리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베컴과 LA갤럭시의 계약이 성립되자마자 “이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를 위해 뛸 일은 없다”라고 공언했던 카펠로는 한 달 만에 자신의 입장을 바꿔 베컴을 중용하는 ‘그답지 않은(?)’ 행동을 보였다. 그것은 카펠로에게 ‘팀을 위한 선택’이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베컴의 ‘포기하지 않는 성실한 태도’가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지난 시즌 레알이 트로피를 거머쥐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이 에피소드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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