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 교차하니 화제 만발이로세”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7.12.31 12: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 ‘올해의 인물’ 푸틴 선정 놓고 뒷말 무성…“국가 안정시킨 대통령, 민주주의 퇴보에는 부정적”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1927년부터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남자, 여자 혹은 아이디어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해왔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가장 격렬한 화제를 자아낸 인물이나 화두가 선정 대상에 포함된 점이다. 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는 최연소자로 이 리스트에 올랐고 심프슨 여사는 영국 왕 에드워드 8세에 의해 결혼을 목적으로 강제 납치되었다는 이유로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 두 번 뽑힌 사람도 많지만 루스벨트는 세 번이나 영광을 차지했다.
나치 독일의 살인마 히틀러는 1938년 반(反)인륜의 상징으로 <타임>의 인물이 되었다. 반전 시위가 세계를 휩쓸었던 1966년에는 25세 이하의 ‘전(前) 세대’가 선정되었다.
컴퓨터는 1982년 인간이 아닌 물체로서 처음 영광을 안았다. 2006년에는 그해를 살아낸 모든 인류 ‘당신(You)’이 선정되었다.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은 다양하고 천차만별이다. 스탈린, 처칠, 아이젠하워, 트루먼, 아데나워, 흐루시초프, 케네디, 교황 요한 13세, 존슨, 미국 우주인들, 브란트, 닉슨, 미국 여성, 카터, 덩샤오핑, 레이건, 아키노, 고르바초프, 클린턴, 부시, 미군 병사 등. 리스트를 일별하면 다분히 여론 노출도가 높은 화제의 중심인물이라는  공통성이 있으나 동시에 역사에 대한 깊은 조명과 해학 그리고 풍자와 조롱도 스며 있다.
2007년도 올해의 인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선정되었다. 푸틴은 선정 과정에서 환경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탄 엘 고어 전 미국 부통령, 해리 포터의 작가 조엘 캐슬린 로링,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 이라크 주둔 미군사령관 데이비드 페트레우스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세계는 푸틴의 선정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의외의 인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타임>은 선정 이유로 ‘21세기 논란의 중심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강대국 지위를 복원하기 위해 안정과 질서를 강요한 사실도 곁들였다. 그러나 내년 3월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후에도 총리를 맡아 대통령 역할을 계속하겠다는 푸틴의 기발한 의중이 근본적인 선정 이유가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푸틴 선정에 대한 <타임>의 설명과 모스크바의 반응은 너무 대조적이다. <타임>은 푸틴이 러시아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빛과 그림자 양면으로 관찰했다. “푸틴은 누가 뭐라고 하든 안정을 이룩했다. 자유에 앞서 안정을 택했다. 푸틴이 우선한 안정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보지 못했던 한 나라의 안정이다.” <타임>이 설명한 긍정적 측면이다.

모스크바, “러시아 개혁으로 세계사에 임팩트 준 것 반영” 반색

부정적 측면의 선정 이유도 만만치 않다. “그는 보이스카우트가 아니다. 민주주의 인사는 더더욱 아니다. 서방 기준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도 그렇다. 자유 언론의 귀감도 아니다.” <타임> 편집국장 리처드 스텐겔의 말이다. 두 가지 관점의 설명을 들으면 칭찬인지 조롱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타임>이 뭐라고 하든 관심을 끄는 대목은 모스크바의 반응이다. 크렘린은 반색했다. 러시아를 개혁하고 그 과정에서 세계사에 준 임팩트를 반영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멋진 뉴스이다. 1990년대의 사회적·경제적 난관에서 러시아를 구출한 푸틴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다.” 크렘린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신이 나서 기자들에게 장황한 논평을 늘어놓았다. 이번 일이 현대 러시아를 좀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러시아 체스의 영웅이자 푸틴의 정적인 가리 카스파로프는 발끈했다. 러시아가 벌인 프로파간다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푸틴이 러시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가 오랜 세월 스스로 개척해온 과정이다. 표현의 자유와 부패 문제가 아직 상당히 남아 있다.”
푸틴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카스파로프의 비난을 반박했다.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면 모국어를 사용하라. 더구나 러시아 안에서는 러시아어로 말하라.” 카스파로프가 <타임> 기자를 만나 영어로 말한 것을 꼬집은 것이다. 카스파로프는 러시아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최근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도전이 크렘린의 방해로 무산되었다고 주장했다. 8년에 걸친 푸틴의 집권 기간 중  러시아의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비판은 완전히 분쇄되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미국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스크바 소재 싱크탱크 ‘파노라마’의 블라디미르 프리빌로프스키는 ‘언론 쇼’라고 비웃었다. 차라리 푸틴이 전쟁을 일으켰다면 그를 선정한 배경을 이해하겠지만 푸틴은 어떤 선정 기준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이런저런 비판에 대한 <타임>의 해명 또한 오묘하다. 올해의 인물은 영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푸틴을 선정한 것은 자유 국가가 중시하는 원칙과 이상을 희생시킨 비싼 대가를 인정한 것이라고 <타임>은 설명했다. <타임>은 그러나 오랫동안 혼란에 빠졌던 나라에 안정을 회복함으로써 러시아를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탁월한 공로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언론 쇼’ 등 비판 많은 가운데 백악관은 “당혹스런 인물” 촌평만

백악관은 <타임>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여성 대변인은 푸틴이 ‘당혹스런 인물’이라는 촌평을 내놓았다.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려는 부시의 계획으로 러시아와 갈등을 빚은 일을 감안하면 이해될 만하다. “그는 분명히 현대사에서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이 대변인은 말했다.
<타임>은 그동안 푸틴에게 스탈린과 고르바초프 같은 러시아 지도자들에 버금가는 지면을 할애하는 취재 열기를 보였다. 푸틴의 통합러시아당이 압승한 말썽 많은 러시아 의회 선거 직후 푸틴은 모스크바 외곽의 별장에서 푸틴을 2시간30분 동안 인터뷰하기도 했다. 러시아 헌법 규정에 따라 3선 출마가 금지되어 있는 푸틴은 자신의 심복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 부총리를 내년 3월 대선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그가 당선될 경우 그의 밑에서  총리직을 맡겠다고 약속했다. 메드베데프는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푸틴은 당 대회 연설에서 메드베데프를 정직하고 고결한 정치인이라고 극찬하면서 그가 당선되면 그와 함께 러시아를 위한 공동의 과업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은 이 과업에 참여해달라는 메드베데프의 제의를 수락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메드베데프가 취임한 후 적절한 시기에 사임하고 푸틴이 특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이렇게 하면 3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 조항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사일 방어망 문제로 부시를 나치에 비유하면서 극렬히 비난했던 푸틴은 <타임>과의 회견에서도 미국이 러시아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푸틴의 대변인은 세계 속의 러시아 이미지를 강조했다. “러시아는 서방과 여타 세계가 러시아를 있는 그대로 다뤄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그런 방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타임>이 푸틴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진정한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이 일로 인해 푸틴과 러시아의 미래가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확실하다. 푸틴과 메드베데프의 정치 역학 관계가 푸틴의 의도대로 흘러갈지는 미지수이다. 이것이 현 시점에서는 최대의 미스터리이며 이 점에서 올해의 인물로 푸틴을 선정한 <타임>의 결정은 최소한 저널리즘 차원에서는 효과의 극대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