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정권과 재벌의 ‘사랑과 전쟁’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 승인 2008.01.0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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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시절 ‘미운털’ 박힌 국제그룹 파산 DJ·노무현 정권에서 금호·두산 급성장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경제 정책과 함께 재벌 대책이 나오곤 했다. 산업합리화나 세계화, 빅딜, 경제력 집중 억제 등 어떤 정책이든 재벌들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한국형 자본주의의 특질인 정경유착의 폐해를 낳았다. 정권과 궁합이 잘 맞는 재벌은 승승장구했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주저앉거나 심지어는 파산의 길을 가야 했다. 관치 금융에서 특혜를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되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아직도 재벌들 사이에는 권력에 줄을 대려 하고, 그래야만 살아남는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있다.  권력이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손보는 식의 행태를 버리지 않는 한 이런 피해의식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 
권력에 잘못 보여 결국 해체까지 당하는 비운을 맛본 재벌은 국제그룹이다. 제5공화국의 신군부는 부실 경영을 문제 삼아 재계 서열 순위 7위였던 국제그룹을 파산시켰다. 당시 신군부 주재 회의에 국제그룹 회장이 불참해서 괘씸죄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정치 자금을 덜 내 미움을 받았다는 소리도 나왔다. 국제그룹의 해체는 정치 권력에게 재벌 기업이 속절없이 당한 상징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선거에 의한 민주적인 정권 교체 전통이 확립된 김영삼(YS) 정권, 김대중(DJ) 정권,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도 많은 재벌들의 부침이 있었다. YS 정부 이래 절차적인 민주화는 어느 정도 진전이 되었지만 정치 권력과 재벌들의 관계는 투명해졌다고 단언할 수 없다.

YS 정권에서 ‘현대’ 시련 맞고 ‘삼성’ ‘대우’는 펄펄 날아

1993년 2월 취임한 YS 정권의 슬로건은 ‘세계화’였다. YS 정권은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목표로 경제의 세계화를 우선적인 과제로 밀어붙였다. YS 시절 정권의 재계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전경련 수장은 최종현 SK그룹 회장. SK그룹은 노태우 정권 말기 우여곡절 끝에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해 10대 그룹에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SK가 통신 주력 기업으로 가는 데 YS 정권의 묵시적인 동조나 협조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4대 그룹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반면 YS 정권에서 현대그룹은 시련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국민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해 당시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 끝까지 겨뤄 ‘괘씸죄’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명예회장이 정계 은퇴까지 선언했지만 현대그룹은 모든 금융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어 허리띠를 졸라매는 내핍 경영을 해야 했다. 걸핏하면 들이대는 세무조사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반면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은 펄펄 날았다. ‘세계 경영’을 내세운 대우그룹은 1995년 5월 GM을 제치고 폴란드의 자동차 메이커 FSO를 인수하는 등 동유럽과 인도, 남미 등 신흥 시장으로 세를 확장해나갔다. 삼성 역시 1994~1995년 반도체 호황 속에서 기록적인 매출을 기록해 재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삼성은 여세를 몰아 이건희 회장의 숙원 사업이던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다. 애초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은 정부 쪽에서도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지만 YS 정권 내내 삼성은 여론 마사지에 공을 들여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 공장 부지를 확보해,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이 합당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말이 나왔다. 결국 삼성차는 르노에 넘어갔고, 이로 인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타격을 받기도 했다.

DJ 정권에서 ‘대우’ 해체되고 ‘LG’는 통한의 눈물 흘려

YS 정권에서 부침을 겪었던 대표적 기업은 한보와 기아그룹이었다.
한보는 관치 금융의 혜택을 톡톡히 받아가며 당진에 한보제철(현 현대제철)을 세우고 전기로 사업에 진출했다. 하지만 한보의 확장을 놓고 택시가 트럭을 삼키는 식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곤 했다. 이처럼 무리한 기업 성장이 부실을 쌓았고, 결국 부도를 내고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이후 한보가 YS 정권의 실세였던 김현철씨 등 정치인들에게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한보의 붕괴는 급속히 빨라졌고, 정권 자체도 휘청거리게 되었다.
한보의 부도와 함께 기아자동차의 몰락은 외환위기를 불렀다. 기아차는 김선홍 당시 회장의 능수능란한 로비 덕분에 적자가 쌓여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환란의 조짐과 함께 부실의 징후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한국 경제의 밑둥을 흔들기에 이르렀다. YS 정권은 이 과정에서도 기아를 대책 없이 싸고돌았다. 기아를 한때 ‘국민 기업’으로까지 포장해 생존책을 모색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김대중 정권에서 사라진 대표적인 기업은 대우그룹이다. 김우중 대우회장은 DJ 정권이 들어서자 1998년 9월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환란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1999년 가을 ‘대우그룹 자금 사정이 이상하다’는 노무라증권 보고서가 나오면서 분식회계로 난맥상을 숨겨놓았던 대우 자금줄의 문제가 터져나왔고, 대우는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김회장은 정부가 봐주었다면 대우를 살릴 수 있었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왜 나만 당해야 하느냐’는 식으로 대우그룹 해체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던 것이다.
DJ 정권에서 LG그룹도 곤욕을 치러야 했다. 빅딜 정책의 와중에서 알토란 같았던 ‘반도체 산업’을 현대에 넘겨야 했던 것이다. 당시 구본무 회장은 청와대에서 정권 실세들을 만나고 나오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반면 현대그룹은 DJ의 대북 정책에 동조하며 정권과 찰떡 궁합을 이루어 갔다.
고 정명예회장은 38선 소떼 방북을 연출하며 대북 사업의 신호탄을 쏘았고, 금강산으로 향하는 유람선을 띄우며 DJ 정권의 대북 첨병 역할을 했다. 이 덕분에 현대는 기아차를 인수해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에 올랐다. 또 건설, 중공업, 금융에서도 정상을 달렸다. 
2001년 3월 정명예회장이 타계하면서 현대그룹은 세 개 그룹으로 쪼개졌다.
오너가 호남출신인 금호그룹은 DJ 정부 최대의 행운아였다. 엄청난 부채에 허덕였던 기업이지만 퇴출도 구조 조정도 모두 피해갔다. 금호는 동아, 신동아, 고합 등이 줄줄이 무너졌으나 살아남았다. 금호그룹의 전체 매출은 3조원, 부채 규모는 4조원으로 유일하게 부채가 더 많은 기업이었다. 재계에서는 부실기업이란 점에서 대우그룹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뒷말이 많았지만 정권의 비호 아래 금호는 꿋꿋하게 버텼다. 결국 금호생명의 부실 생보사 인수, 적자덩어리였던 아시아나의 코스닥 등록 등으로 오히려 성장 가도를 달렸다.
DJ 정부의 또다른 행운아는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 30대 초반이던 5공 시절 명성그룹과 한양유통을 인수해 성가를 높였던 김회장은  YS 정부가 시작되자마자 구속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DJ 정부에서 다시 부활한 그는 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데 성공해 한화그룹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금호그룹과 두산그룹의 성장이 돋보인다. DJ 정권에서 해체당한 대우그룹의 알짜 기업을 나누어가지며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 것이다.
두산그룹은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했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두 기업은 ‘386 실세’들을 의식하며 로비전을 펼쳐 그룹의 덩치를 더욱 키울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친기업(business- friendly) 정책을 펴겠다고 공언했다. 이 정책에도 어떤 기업은 궁합을 맞추고, 또 어떤 기업은 맞추지 못할 수 있다. 이번 정부에서는 어떤 재벌이 두각을 나타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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