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도 식후경” 새 길 찾은 타이완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1.2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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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서 ‘경제 회생’ 민심 업고 국민당 압승 중국과의 관계 개선 전망에 미국도 반색

지난 1월12일 실시된 타이완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당(國民黨)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지난 8년간 중국과 대립 정책을 편 민진당(民進黨)의 천수이볜(陣水扁) 총통(대통령)은 딜레마에 빠졌다. 국민당의 승리는 이미 예상된 것이었으나 너무 압도적이었다. 1백13개 의석 중 4분의 3인 81석을 차지함으로써 3월22일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의 승리 기반을 마련했다. 민진당은 27석을 얻는 데 그쳤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60년 전 중국 공산당과 한때 내전까지 벌였던 국민당은 지금 중국과의 화해를 표방하면서 궁극적인 통일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국민당은 또한 타이완 독립보다는 중국과의 긴밀한 경제·문화 관계를 지지한다. 이런 노선에 비추어 3월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베이징과의 긴장은 완화될 전망이다. 중국과의 대립각으로 사사건건 긴장을 조성한 천 총통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미국도 한숨 돌리게 되었다.

 

‘참패’ 안은 민진당도 대중국 대립 정책 완화할 듯

집권당의 참패 요인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궁극적인 독립을 위해 중국과 대결한 노선이 현실에 맞지 않았고 이 때문에 경제까지 위축되어 국민의 분노를 샀다. 중화민국 대신 타이완이라는 이름으로 유엔에 가입하는 문제를 국민투표에 회부하려던 정책은 역풍을 불렀다. 타이완의 유엔 가입 문제는 외교적 고립도 초래했다. 중국과 수교한 국가는 1백70개국인데 비해 타이완과 수교한 나라는 27개국으로 줄었다. 중국은 타이완을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으며 타이완이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거나 통일을 향한 조치를 무한정 지연하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국민투표 시도를, 위험할 뿐만 아니라 ‘도발적인 정책’으로 규정했다. 민진당의 총통 후보 셰창팅(謝長廷))은 대내외 분위기를 감지한 듯 자신은 대중국 정책에서 천 총통의 대립 정책을 완화할 것임을 암시했다. 국민투표가 실시되더라도 이를 이슈화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유권자들은 또 집권당의 어설픈 독립 추구로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급속히 발전하는 중국 경제 붐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국민당을 선택했다. 이들 사이에는 민진당의 집권을 연장시켰다가는 경제는 점점 나빠지고 타이완의 국제적 위상은 더 위축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민진당 정부의 경제 정책은 죽을 쑤었다. 국민당이 지배하는 국회의 견제로 주요 법안들은 폐기되고 독립 쟁취를 위한 국방비 증액 계획마저 좌절되었다. 민진당 8년 집권이 안겨준 것은 환멸밖에 없다. 게다가 천 총통 일가의 부패 스캔들까지 겹쳐 당의 이미지는 퇴색했다. 유엔 가입을 통해 타이완의 정체성을 찾고 언젠가는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정책은 사상누각이었다. 실용적 접근을 바라는 국민들의 욕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노련한 중국은 타이완 국민들의 분위기를 진작부터 감지하고 이번 선거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무위(無爲)정책’을 택했다. 무력 위협도 자제했다. 3월 대통령 선거에서도 같은 정책을 지속할 방침이다. 이것이 주효했다. 중국은 선거 결과에 대해 아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국민당의 권력 복귀를 반기고 있다.

 

3월 총통 선거에도 영향 미쳐 정권 교체 예상

2000년 천 총통의 대통령 당선으로 국민당의 50년 집권이 끝났을 때 국민은 환호했다. 신바람 나는 세상이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거대한 중국을 상대로 대결 정책을 편 것은 시대착오였다.
중국은 최근 국민당 관리들을 자주 본토에 초청했다. 이들에게 민진당 집권이 끝나면 양안 (兩岸) 관계도 현격히 개선될 것임을 은근히 약속했다. 국민당 대통령 후보 마잉주(馬英九)도 이 흐름에 편승했다. 본토와의 대결을 종식하고 경제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다짐했다. 위축되는 경제에 짜증이 난 국민들은 실현성 없는 독립보다는 실익을 바랐다. 지난해 12월 2기 임기의 마지막 달을 맞은 천 총통은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당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분위기를 쇄신하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당 의장 사임이 총통직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양가 없는 제스처로 받아들여질 뿐 사태의 반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국민투표 안이 나왔을 때 특히 미국이 극렬하게 비판했다. 미국의 불편한 심기는 라이스 국무장관의 논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당은 53.5%, 민진당은 38.2%를 득표했다. 민진당은 창당 이래 최악의 실패를 기록했다. 2004년 총통 선거에서 천 총통이 50.1% 득표로 당선된 점을 감안하면 3월 선거에서 집권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분석가들의 판단이다. 국민당의 마 후보는 이미 여론조사에서 20%나 앞서고 있다. 선거 결과가 주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독립 정책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총통 선거 전망을 현 단계에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이르다. 총선 결과 속에는 천 총통의 대 중국 대결 정책을 거부했다는 것 이상의 복잡한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부 유권자들 사이에는 타이완 독립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 따라서 3월 총통 선거는 총선보다 더 치열할 것이며 결과예측이 쉽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문제는 투표율이다. 총선 투표율은 58%였다. 총통 선거 투표율이 80%로 올라간다면 사태는 미묘해질 수 있다. 천 총통의 독립 추구 정책은 중산층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경제를 경시한 그의 정책이 중산층에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심기일전해 중산층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 성공한다면 국민당 후보의 승리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일부 유권자들은 국민당의 마 후보에게 총통일 될 기회를 주어도 될 것인지 유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국민당 지배 하의 의회와 민진당 총통으로 구성되는 권력분산을 통해 정치적 균형을 이루는 것도 해롭지 않다는 여론도 만만찮다.
민진당의 패인이 경제 경시에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100% 진실은 아니다. 그의 집권 중 경제는 4~4.5%의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했다. 타이완 같은 고도 성장 국가 기준으로 보면 그리 나쁜 실적은 아니다. 다만 국내 서비스 분야를 좀더 개방하고 본토와의 무역 제한을 과감하게 풀었다면 그 이상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베이징 못지않게 선거 결과를 반기는 쪽은 미국이다. 총선 여파로 3월 총통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마 후보는 미국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로 친미파이다. 그의 대중국 정책은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현상 유지이다. 그는 친미와 친중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실리를 챙기려 하고 있다. 미국과는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과는 화해를 추구한다.
베이징은 국민당 후보가 당선되면 양안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주는 경제적 혜택에 눈이 멀어 베이징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은 타이완인들의 자존심에 배치된다. 또한 보호주의 성향이 강한 국민당이 집권한 후 국내 경제 개방을 주저한다면 국제 경쟁력이 더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과 타이완 네티즌들은 양안 관계를 엄격한 아버지와 가출한 아들과의 관계로 비유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호 관계를 단절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적당한 선에서 이들 ‘부자 관계’가 잘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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