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진보 참신한 노선인가 ‘유사 상품’인가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1.2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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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은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위원들을 대상으로 손학규 대표가 이끄는 통합신당의 정체성 등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좀 부드러운 이명박 노선이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의 이른바 ‘새로운 진보’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찬성하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강조한 점을 볼 때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손대표가 말하는 새로운 진보나 제3 길은 진보와는 전혀 무관한 신보수주의의 제3 샛길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했다.
통합신당이 손학규 대표 체제로 내부 혁신과 외형 확대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면서 그가 당의 이념 좌표로 내세운 ‘새로운 진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대선 참패 이후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진보·개혁 진영이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을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있는 반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한나라당의 신주류가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손대표는 취임 첫날부터 새로운 진보를 화두로 끄집어냈다. 그는 “새로운 진보는 국민 생활을 돌보는 것으로 중도적 가치와 실용적 정신이 반영되는 진보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새로운 진보가 본받을 만한 대상으로 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이 추구했던 ‘제3의 길’ 노선을 들었다.
손대표가 주창하는 새로운 진보의 모습은 최근 가진 언론 인터뷰와 방송 연설을 통해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우선 그가 새로운 진보를 표방한 데는 기존 진보 세력에 대한 불신이 근저에 깔려 있는 듯이 보인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세력이다”라는 비판적 시각이다.
손대표는 “기존 진보 세력이 국민에게 버림받은 것은 말로만 진보와 평화를 외쳤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일자리 걱정, 교육, 노후, 주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말만 시끄러워 국민을 불안하게 했다.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송세월한 대가였다”라고 비판했다.
그런 만큼 새로운 진보는 향후 보수는 물론 기존의 진보와도 전선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1차 전선이 ‘보수 대 진보’의 전선이라면 2차 전선은 ‘구진보 대 신진보’의 전선이 되는 셈이다. 손대표는 “민주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의 존재와 효용은 분명하지만 낡은 진보에서 국민들은 희망을 보지 못했다. 거기서 벗어나자는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손대표 “무능한 세력 대체하는 유능한 진보의 길” 강조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진보의 방향성은 기존 진보 세력이 국민에게 “빵을 주었느냐, 옷을 주었느냐”라고 반문한 데서 잘 드러난다. ‘먹고 사는 문제’가 최우선이라는 뜻이다. 손대표는 “진정한 진보는 무엇을 하더라도 국민에게 이익과 도움이 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국민 속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겠다. 국민의 생활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정치를 하겠다”라고 재차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손대표는 “국민은 이념 논쟁에 손사래를 치고 있다. 대신 국민의 손에 떡 한 조각이라도, 옷가지 하나라도 제대로 쥐어주는 정치를 원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시대의 부패한 세력에 대항해서 깨끗한 정치를 확립하고 이념 지향의 무능한 세력을 대체할 깨끗하고 유능한 진보의 길이 우리가 지향할 새로운 진보의 길이다”라고 정리했다.

 

이런 의미를 담아 손대표는 자신이 내세운 진보를 ‘생활 진보’ 또는 ‘실용 진보’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생활’과 ‘실용’을 중심에 놓은 ‘손학규의 진보’가 진보·개혁 세력의 당면 과제인 단합과 쇄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반대 기류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손대표의 정체성을 의심해온 당 안팎의 반대 진영에서는 손학규식 진단과 해법이 ‘이명박의 실용’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되묻고 있다.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손대표는 한·미 FTA를 찬성하고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대표 취임 이후에도 “가능한 한 빨리 처리가 되고 비준이 되었으면 한다”라는 입장을 밝혀 찬성 당론을 주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진보라는 것이 한·미 FTA 찬성이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라는 식의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손학규의 실용’을 ‘이명박의 실용’에 빗대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그의 정치 역정에 대한 평가도 일부 작용하고 있다. 정치인 손학규는 정치인 이명박과 적지 않은 공통점을 지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데서부터 경기도지사와 서울시장을 각각 지낸 후 대권 도전에 나선 것까지 닮은꼴 행보를 이어왔다. 한나라당 내 비주류로서 1999년 미국 워싱턴에서 홍준표 의원을 포함한 ‘3인방’이 의기투합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이는 야당 대표와 대통령으로 다시 서게 될 두 정치인이 유사한 정치 경험으로 인해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당내 일부에서 “한국 정치사상 가장 협조적이면서도 가장 단호한 야당을 만들겠다”라는 손대표의 발언 중 유독 ‘협조’라는 단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이러한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한나라당과의 정책적 차별성과 정치적 선명성이 약화할 경우 전통적 지지층과 더 멀어지고 결국 4·9 총선에서 대패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토끼를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잃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손대표도 이를 의식한 듯 ‘선명 야당’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기존 지지층 붙들기에 부심하는 모습이다. 1월23일 광주를 방문해 동요하는 호남권 전통 지지층을 다독인 그는 다음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예방해 “50년 정통 야당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가져달라”라는 격려를 듣고 돌아왔다.
 

‘중도·진보’ 자청하는 당내 주류는 “좀더 왼쪽” 주문해

손대표가 ‘독배’일 수도 있는 대표직을 수락하면서 내건 ‘새로운 진보’가 지리멸렬한 진보·개혁 진영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줄 수 있을지, 아니면 반대파의 견제에 발목이 잡히거나 스스로 한계에 부닥쳐 중도 하차하게 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당내 구성원들이 손대표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시사저널>이 통합신당 중앙위원들을 대상으로 지난 1월21일과 22일 이틀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손대표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매우 잘하고 있다’(17%), ‘잘하고 있다’(43%) 등 긍정적인 답변이 많았다. 교황 선출 방식이 도입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손학규 대표 체제인 만큼 초기 혼란이 예견된 상황이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추세인 것으로 해석된다.
손대표의 새로운 진보와 이당선인의 실용 보수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도 ‘차이가 크다’(21%), ‘조금 차이가 있다’(55%) 등 차이에 무게가 더 실렸다. 손대표도 그동안 “새로운 진보는 보수처럼 시장 경제를 인정하되 소외된 계층과 사회적 약자에게 항상 따뜻한 배려를 하는 것이다”라며 ‘차별화’를 강조해왔다. 물론 ‘차이가 없다’(18%), ‘전혀 차이가 없다’(4%) 등 부정적 답변도 적지 않아 정체성 논란의 불씨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의할 대목은 중앙위원들이 자신의 이념 성향을 어디에 두고 있고, 당의 이념 중심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여기느냐는 데 있다. 설문에 응답한 중앙위원 64%는 자신을 ‘중도·진보’라고 응답했고, 현재 당의 이념 성향도 56%가 ‘중도·진보’로 꼽았다. 여기서 ‘당의 이념 중심을 어느 쪽으로 옮겨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절반 가까운 47%가 ‘진보 쪽’이라고 답했다. ‘보수 쪽’이라는 응답은 15%에 불과했고, 25%는 ‘옮길 필요 없다’라고 했다.
결국 당내 주류는 스스로를 ‘중도·진보’로 여기고 있고 당이 현재보다 좀더 ‘왼쪽’으로 움직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손대표의 새로운 진보가 ‘우향우’로 치달을 경우 당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낳는 결과이다. 이는 특히 ‘인적 쇄신’이라는 또 다른 당면 과제와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관측된다.
손대표는 인적 쇄신과 관련해 당 지도층을 겨냥해, “자기 희생의 결단이 필요하다. 여기서부터 쇄신과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라고 강조했다. “특정 그룹과 인물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는 우상호 대변인의 해명이 있었지만 당내에서는 상당한 물갈이가 단행될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손대표가 새로운 진보로서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진보 학계에서도 ‘한국식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 현실에 걸맞은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발전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 서구의 ‘제3의 길’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생산적으로 응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서이다.
문제는 이를 실천에 옮길 정치 주체가 있느냐이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손대표가 제시한 제3의 길은 내용이 확실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노무현 정부보다 더 오른쪽으로 가면서 제3의 길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제3의 길로 나서려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실시했던 복지 정책보다 더 왼쪽으로 가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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