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 고집’ 같은 화풍 세계가 반한 판타지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8.02.0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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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최울가씨, 낙서 같은 그림에 원시·무중력·몽환 등 담아

 
우리 작가의 미술 작품들이 국내 경매 등에서 기록을 갈아치울 때마다 갖게 되는 궁금증이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국내 작품들이 과연 얼마나 통할까 하는 점이다.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든 국내 시장에서든 작품의 질과 가격은 별개이다. 마케팅 여부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간혹 우리 미술 작품이 외국 유명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된 기록들이 보도된 적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 시세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술 시장의 글로벌화를 외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미술 시장에서는 아무 제약도 없이 외국 작가 작품 수입 일변도의 판세가 주류를 이룬다. 그에 비해 우리 작가들의 해외 시장 진출은 미미한 상태이다. 물론 우리 작가의 해외 진출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앞으로 우리 미술 문화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우리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 좀더 왕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국내용 작가와 국외용 작가의 구분을 넘어 우리 작가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활기차게 활동하는 날을 우리 모두는 염원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작가가 있다. 서양화가 최울가(본명 최융대·53)이다. 최울가의 그림은 우리 화단에서는 보기 드문 화풍이다. 마치 아이들 낙서 같은 분방한 필치와 선묘, 예측 불가능의 원시적 에너지, 무중력의 공간성, 꿈꾸는 듯한 몽환적 화면…. 이같이 독특한 양식을 일구어 여러 나라를 누비면서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 최울가는 우리 화단에서 과소 평가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10년, 그 밖의 나라에서 10년 등 거의 20여 년 국외 체류를 했기 때문인지 우리 화단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해외 진출 드문 한국 화단에서 ‘글로벌 성공’

1997년 어느 날 우연히 인사동에서 작가를 만났을 때, 그는 일본 오사카 전시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오사카·교토 순회전에서 그림이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바 있어 반가움은 더했고,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때 그는 아사히 TV 초대로 가진 순회전이 성공을 거두면서 일본에서의 전시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던 터였다. 작가의 이러한 활약이 그리 쉽게, 그리고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사실 그의 그림이 상당히 감각적이고 문예적 센스를 갖추고 있기는 하나 우리 정서보다는 미주 쪽에서나 더 잘 어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본에서의 흥행은 의외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몇 차례 일본 미술 시장을 겪어본 입장에서 그들의 기호와 입맛에 맞는 작품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잘 가늠되지 않는다. 아무튼 작가는 이후 프랑스, 일본 등에 많은 애호가들을 확보했으며, 그것을 계기로 하여 파리, 독일, 뉴욕 등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화면을 보면 무의식적 욕구와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자유로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꾸밈없는 자폐적 향수와 유희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정도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양식적 차이는 다소 있지만 1990년대 화려하고 강렬한 원색조의 그림들과 최근 다채로운 선묘 작품들에는 공통적으로 모종의 질곡을 깨는 자유로움이 넘친다. 실제로 작가는 ‘무중력’의 환각 같은 것을 꿈꾸고 사는 것 같다.
“우리는 무중력 상태에서 무중력을 느끼려 함이 결코 아니다. / 중력 속에 무중력의 의식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이 세상. / 에너지도 필요치 않고 / 모든 것이 부패하지도 않는…. /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 지금도 꾸고 있는 새벽녘의 짧은 꿈 / 그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끝없는 향유의 오르가슴처럼. / 이 세상에 무중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해”(작가 노트)

 

아이의 옹알이와도 같은 비밀스런 형상들과 제스처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들을 읽어내는 묘미도 쏠쏠하다.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대체로 일상적 풍경의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들은 변형과 무중력적 구성에 의해 유머러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현실적인 생경함과 실존주의적 진지함을 엿보게 한다. 특히 1990년대의 작업들이 그러하다.
TV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브라운관을 통해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무작위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프레임의 문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부유하고 있다. 또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 역시 환각과 숙취에 시달리는 눈동자를 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모습들이 우리의 의식을 무중력의 경험으로 인도하고 있는 듯하다. 그야말로 우리 동시대의 풍경을 암각화로 새기듯 거칠고 강렬하게, 그러면서도 특유의 해석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이 시대 풍경을 치밀하게 변형·재구성

일견 작가의 화면은 충동적 카오스와 무중력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질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알고 있는 작가는 그렇게 충동적이거나 우연에만 방임하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화면을 좀더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통제와 조절 장치에 의한 조율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형과 재구성이 의외로 치밀하고도 탄탄한 구성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색상면에서도 심미적인 코드를 암암리에 내장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색면 처리에서도 붓 하나만이 아니라 조각하듯 다양한 효과의 스크래치 등에 의해 구사되고 있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동색계의 색이라도 잘 조율된 심미적 배색을 율동적으로 구사한다. 다양한 톤과 효과를 조율함으로써 말이다. 이 내용들로 미루어볼 때 테크닉과 감각에 의해 잘 조절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작가의 화풍은 많이 바뀌고 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유년기의 아이들이 그린 것 같은 색연필 선묘화를 연상시키는 화면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한 연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화면 귀퉁이에 사각의 색면 패치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과 스크래치에 의해 바탕 아래의 색이 드러나게 되는 선묘가 가미되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퇴행적 낙서 이미지 자체도 프리미티브의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패턴화 내지는 도식화되고 있는 느낌을 불가피하게 주기도 한다. 작가가 해온 작업의 전체에 대입해본다면 오랜 무중력의 치열한 여행에서 돌아와 담백한 관조의 휴식을 누리기 위한 또 하나의 선택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점에서도 작가는 전혀 반대되는 흑색톤의 작품을 함께 병행하면서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맨몸으로 국제 무대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작가의 근성과 에너지, 그리고 타고난 감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올해에도 독일·스페인 순회전이 잡혀 있어 바쁘게 보내야 하는 모양이다. 그는 바탕의 흰색은 유난히 잘 마르지 않는 색이어서 1년에 20점 이상을 그려내기가 어렵다고 푸념한다. 아무리 들어도 행복한 푸념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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