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들 홀대해서야 문화재 관리가 제대로 되겠는가”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2.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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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전 숭례문 해체·복원 공사에 참여했던 신응수 대목장 인터뷰 / “기와 뜯어내고 불 꺼야 한다는 내 말 정부 관계자들이 묵살했다”

 
지난 2월10일 밤 9시30분 숭례문 화재 현장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한참 타오르던 불이 소방대원들의 진화 작업으로 잦아들 무렵이었다. 고함소리의 주인공은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신응수 대목장(67)이었다.
1962년 숭례문 해체·보수 작업에 참여해 서까래를 하나하나 뜯어낸 경험이 있어 누구보다 숭례문 구조를 잘 아는 신대목장은 기와 지붕과 서까래 사이에 불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에 알렸다고 한다.
기와나 천장을 뜯어내지 않고는 숨어 있는 불길을 잡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묵살되었고, 결국 화재 발생 5시간 만인 다음날 새벽 2시5분께 숭례문이 무너져내렸다.
신대목장은 “이제는 문화재 관리가 바뀌어야 한다. 문화재청과 소방당국의 공조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장인들을 활용하지 못했다. 문화재청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인들의 의견은 무시되니 문화재 관리가 제대로 되겠는가”라고 개탄했다.
대목장은 목조 건물 건축에서 집 지을 나무를 선별하고 이를 마름질하는 것은 물론 설계·감리까지 겸하는 목수를 지칭한다. 신대목장이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궁궐 건축의 대부로 알려진 그는 지난 1958년 목수의 길로 들어선 이후 1961년 20세의 나이에 숭례문 해체·복원 공사에 참여했다. 당시 공사를 총 지휘한 고(故) 조원재 대목장 밑에서 직접 숭례문 서까래 하나하나를 뜯어냈고 기와를 깔기 위해 적심목을 깔았다고 한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지난 18년 동안 경복궁 복원 사업을 진두지휘 해왔다.
이외에 불국사·수원 장안문·창덕궁 등 유명 문화재 재현은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94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출생인 신대목장은 병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망치질과 톱질을 배우며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한평생을 목재 문화재 보수·복원에 바친 신대목장은 우리나라 문화재의 허술한 관리 실태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화재로 붕괴한 숭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심정인가?

애처롭다. 스무 살 때인 1961년 숭례문 해체·보수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자식을 잃은 기분이다. 대패질하고 톱질해서 보수하며 손때가 뭍은 숭례문이다. 무엇보다 가치로 따질 수 없는 국보가 아닌가.

복원할 수 있다고 보는가?

1961년과 2006년 실측한 도면이 있어 복원은 가능하다. 문제는 복원된 숭례문이 과거의 그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깨진 국보급 도자기를 다시 붙이거나 새로 구워낸들 과거의 유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국민의 마음을 보듬을 수는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목재 문화재 복원에는 목재가 매우 중요하다는데, 수급에는 문제가 없는가?

숭례문 복원에는 우리나라 육송을 쓴다. 아무리 좋은 수입목이라도 우리나라 목조 건물에는 적합하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숭례문 복원에 쓸 만한 목재 조달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금강송이 좋다느니 춘향목이 좋다느니 하는 소리들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육송이면 된다. 금강송은 곧게 뻗어 있고 붉은 빛이 돌아 보기에는 좋다. 하지만 목재로는 부적합하다.
한 가지 언짢은 것은 숭례문 화재로 자칫 목재상들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점이다. 숭례문에 화재가 난 그날 현장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좋은 소나무가 있으니 복원할 때 사서 쓰라는 장사치의 전화였다. 문화재청을 통해 내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하는데, 얼마나 울화통이 치밀던지….

숭례문이 무너진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날 저녁 뉴스를 접하자마자 숭례문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날 밤 9시 반께 불이 꺼졌다고 했다. 그러나 연기가 계속 났다. 서까래와 기와 사이에 불이 숨어 있을 공간이 있다. 기와를 뜯어내고 숨어 있는 불을 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현장에 있는 정부 관계자들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문화재청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조상은 초가집에 불이 나면 지붕의 이엉을 먼저 걷어냈다. 아궁이에서 올라온 불길이 이엉과 서까래 사이를 타고 이동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마침 화재 현장에서 한 방송사가 시민 인터뷰를 한다면서 나를 인터뷰 했다. 그런데 이를 본 문화재 관계자들이 오해했다. 내가 복원 공사에 참여해 돈을 벌 목적으로 숭례문 화재 현장에 와서 방송사 인터뷰를 했다는 것이다.

 

현재 숭례문 수습 작업이 한창인데, 그 작업에 참여하고 있나?

화재가 난 다음날 서울시가 나를 포함한 세 명의 대목장을 급히 찾았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대목장들을 철수시키고 궁(宮) 보수단을 투입해 숭례문 수습 작업을 하고 있다. 타다 남은 재도 소중한 문화재인데, 목재 문화재 전문가를 내치는 이유를 모르겠다. 궁 보수단은 기능인들이지만 중요 문화재 수습이나 복원에는 경험이 중요하다. 목공 일을 조금 한다고 목재 문화재를 다룰 수는 없다. 이론으로 배우지 못하는 산 경험이 많은 장인이 절대 필요하다. 물론 수습 작업이 끝난 이후 복원에는 대목장들을 활용하겠지만 목수를 일개 일꾼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 그날 잠을 못 잤다.

그렇다면 문화재 보수·복원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숭례문을 포함한 문화재 보수·복원을 민간 건설회사에 맡기면 안 된다. 건설회사는 하청 업체에 일을 맡기고 그 하청 업체는 또 다른 하청 업체에 일을 맡긴다. 이익이 목적인 민간 회사에 일을 맡기면 문화재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1961년 숭례문 해체·보수 공사 때에는 서울시가 국내 최고 목수들을 모아 직접 일을 진행했다. 돈과 명예욕이 없는 작업이 이루어져서 건강한 숭례문이 재현되었다. 어떤 로비가 오고가는지 모르겠지만 문화재 복원에 이권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또 화재로 불탄 숭례문을 제대로 복원해서 새로운 천년을 맞게 하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옛날에 사용했던 도구와 건축 방식을 이용해 복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수·석공·와공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문화재 보수·복원을 많이 하는 곳도 없다. 대충 그리고 빨리 하다 보니 부실해 자주 해
야 한다. 일본의 경우 장인 한 사람이 평생 다섯 채를 하면 많이 한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한 번 할 때 철저히 해야 한다.

목재 문화재 보존 현실은 어떤가?

국보·보물급만 1백50여 개 있다. 사찰 등 일반 문화재까지 합하면 1천개가 넘을 것이다. 모두 소중한 문화재이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창피할 정도이다. 낙서는 기본이고 아예 글자나 그림을 파놓은 곳도 있다. 태국에서는 왕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도 관광객이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며 신발까지 벗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오래된 문화재도 아닌데 말이다.

문화재 보존에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문화재 보존·관리를 강조하는 장인들에게 정부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숭례문 화재 사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지만 문화재청과 소방 당국의 공조가 미흡하다. 어떻게 불을 꺼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문화재 보존은 물론 보수·복원 이야기가 나오면 문화재청은 예산 타령만 한다. 그러니 새로운 문화재를 짓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우리 세대가 후세에 물려줄 20세기 문화재는 없는 셈이다.
예산이 없다면 기업들로부터 성금을 받고 국민의 참여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성금이라고 해서 반드시 돈만은 아니다. 많은 국민이 자원 봉사 활동의 형태로 얼마든지 문화재 보존이나 복원에 동참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대목장은 몇 명인가? 그리고 대를 이어 후배를 배출시키는 양성 기관은 있는가?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은 전흥수씨(71)와 최기영씨(64)를 포함해 전부 세 명이다. 그 밑으로 기능장들은 많다. 그러나 국립 양성 기관이 없다. 사설 양성 기관이 두 곳 있는데, 일반적인 목공 일을 가르치는 정도이다.

대목장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

(이 질문을 받고 신대목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보다 처우를 개선해주면 좋겠다. 처우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활용을 해달라는 것이다. 끌질 하나 제대로 배우는 데도 10년이 걸릴 정도로 목수 일은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 평생 목수 일을 해온 사람과 학자 중 누가 목재를 고르고 다듬을 줄 알겠는가.

이런 문제를 왜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가?

지금까지는 서로 낯 붉히는 일 같았고 또 자칫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질까 우려했다. 그러나 숭례문 화재 사고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는 국회 등을 통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목재 문화재 관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하도록 할 것이다.

50년 목수로서의 삶을 돌아본다면.

17세 때부터 목수 일을 시작했다. 당시 한옥을 짓는 일을 하는 사촌형 밑에서 일을 거든 것이 평생 일이 되었다. 이후 도편수 고(故) 조원재옹의 제자가 되어 일을 배웠다. 1970년 불국사 복원에 부편수로 참여했고, 1975년에는 수원 장안문에서 도편수로 일했다. 1982년 청와대 영빈관인 상춘재와 1989년 대통령 관저 신축을 맡았다. 지난 18년 동안 매달린 경
복궁 복원 사업이 내년이면 광화문 공사를 마지막으로 거의 마무리된다.
평생 목수의 삶을 걸어왔지만 후회는 없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 이지만, 대목장이 된 이후 각 분야의 대가들을 직접 접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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