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막 나가니 “시라크가 그립다”
  • 파리·최정민 통신원 ()
  • 승인 2008.03.0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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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버려 멍청아” 내뱉은 사르코지에 염증 느낀 프랑스 물가는 고삐 풀리고 지지율 추락…‘구관이 명관’ 되나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이다. 농민과 농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늘 각별했다. 성난 농민들이 과격한 시위를 할 때도 국민이 눈감아주거나,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 농업보조금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를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매년 열리는 농업박람회에 국가 수반이 참석해 축하하는 것도 관례이다. 그런데 얼마 전 사르코지 대통령이 처음 방문한 농업박람회에서 볼썽사나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밀려드는 인파와 인사를 하며 지나가던 대통령이 악수를 거부한 한 시민과 막말을 주고받은 것이다.
“꺼져버려 멍청아.” 국가 수반의 입에서 나온 이 막말을 담은 동영상은 사건 발생 후 2일 만에 조회수 100만건을 기록하며 특종 중 특종이 되었다. 사태가 진정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절대 굽히지 않는 사르코지는 지난 2월26일 일간지 르 파리지앙을 통해 “대답을 말았어야 했다”라고 유감을 표명했다. 그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굴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르 파리지앙은 문제의 동영상을 올렸던 바로 그 신문이다.
사르코지가 막 나가고 있다. 슈퍼모델과의 결혼으로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슈 메이커인 그가 또 한 번 특종을 날린 것이다. 현재 프랑스에 주재하는 각국 특파원들은 매일매일 그의 기사를 송고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고 한다. 벨기에의 일간지인 ‘르 스와’의 한 특파원은 “이렇게 매일 특종을 쏟아내다간 정국 운영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번 막말 파문 이전에도 지난주 내내 사르코지는 화제를 몰고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 교과 과정의 유태인 학살 역사 교육 문제에서부터 측근의 사이언톨로지 관련 발언까지 분야도 다양했다.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유태인 학살 문제를 의무적으로 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프랑스 여성 정치인으로 쇼아 추모 재단의 명예회장이자 아우슈비츠 생존자이기도 한 시몬 베이의 반발까지 부를 정도로 큰 논란을 야기했다. 또한 현재 국제적으로 사이비 종교라고 지탄받는 사이언톨로지에 대해 그의 측근인 엠마뉴엘 미뇽이 내놓은 “프랑스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은 우려와 함께 좌파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이같은 국가 수반의 좌충우돌 행보에 대해 좌우 진영에서는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먼저 전통 좌파 지식인으로 지난 대선에서 사르코지를 지지해 이목을 끌었던 앙드레 그뤽스만은 “이제 진정 프랑스에도 다른 유럽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가 수반의 권위적인 모습이 사라졌다”라며 환영했다.
한편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전 편집장인 세르쥬 쥐리는 “사르코지에게 주로 정치적으로 조언하는 사람은 에드와르 발라뒤르와 라파랭 등 두 전직 총리이다. 그들은 사르코지가 운신의 폭을 넓히도록 하기 위해 자유롭고 파격적인 행보를 주문했을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발라뒤르 총리는 사르코지의 막말 파동이 벌어진 직후 “나는 그의 용기를 정말 좋아한다”라고 두둔했으며, 라파랭 총리는 “막말이 오고간 동영상의 대화는 사적인 대화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다.

입만 열면 화제 만드는 ‘이슈메이커’…“개혁은 어디 갔나”

최근에는 사르코지를 둘러싸고 지방 선거 이후의 개혁 추진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현재 프랑스는 지방선거를 2주 앞두고 있다. 사르코지가 집권 이후 개혁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지 않은 것은 지방선거 전 몸 사리기였다는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 대선 때부터, 지난 정부 및 지난 세대와의 차별화를 내세우며 프랑스를 갈아엎겠다던 사르코지가 별다른 개혁안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지방선거 전에 과도한 개혁을 했다가 민심이 이반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되레 개혁의 시기를 놓친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최근의 지지도 하락 및 막말 파문이 지방선거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이미 여권 내부에서조차 사르코지에 대한 거리 두기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적재적소에 이용했던 미디어 전략도 이제 약발이 받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이번 막말 파문에 대해, 자비에 베르트랑 고용부장관은 “미디어들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하는 것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라고 불평했지만, “미디어를 이용한 대통령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라는 세간의 분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2월25일 TV 방송 ‘프랑스 2’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프랑스의 물가는 식료품을 중심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기준 식료품의 가격 상승률이 최고 5~20%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유·치즈를 필두로 한 유가공 식품의 경우 최고 40%라는 믿지 못할 상승폭을 보이고 있다. TF1은 2월26일 2007년과 비교해 대형 마켓의 가격이 2.4%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 수치는 3%인 스페인보다는 낮지만 1.6%인 이탈리아보다는 높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르코지의 대선 제1 공약이 물가 안정임을 기억하는 국민의 배반감은 증폭되고 있다. 급기야 프랑스와 피용 총리는 경제부장관을 불러들여 응급 처방안을 발표했다. 현재의 물가 상승폭을 면밀히 조사하겠다는 방침이다. 결과 발표는 3월10일로 예정되어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고삐 풀린 물가나 추락하는 지지율을 얼마나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는 이번 사태 이전에 이미 38%라는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까지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모르는 처지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르코지는 역시 그답게 “인기 없는 대통령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의도적인 의전 진행이었을까, 이번 막말 파동에 대해 사르코지가 유감을 표명한 날 공교롭게도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가 농업박람회장을 찾았다. 통상적인 시간을 훨씬 넘긴 3시간30분 동안의 방문에서 시라크는 “농업박람회는 연중 최고의 행사이다”라며 농민들을 치켜세웠고 맥주와 치즈를 시식했다. 농민들은 시라크는 늘 자신들을 이해해준다며 흡족해했다.
군중들의 환호 속에 떠나는 전임 대통령을 두고 한 시민은 “그가 그립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의 프랑스 국민에게는 노쇠해도 따뜻하게 국민을 위로해주는 시라크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지 모른다.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3개월 만에 톱 모델과의 결혼을 성공시킨 사르코지가 이제 지방선거를 2주 앞두고 높은 물가와 낮은 지지율이라는 이중고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르코지는 이번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직후 바이오 공장을 방문하고 경제 관련 원탁회의를 주재했다. 아프리카 순방길에도 오르는 등 다시 예전과 같은 힘찬 행보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민심은 여전히 냉랭하다. 사르코지에게는 지금 국면을 전환할 히든 카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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