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못마땅하지만 앞으로 잘 해내겠지”
  •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풋볼위클리> 편집장) ()
  • 승인 2008.03.03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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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선수권 축구대회 우승한 허정무호가 갈 길

 
지난 2월23일 충칭에서 막을 내린 제3회 동아시아선수권 축구대회에서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가 처음 열린 2003년 첫 우승을 거머쥔 이래 한 대회 걸러 정상에 복귀한 셈이다.
허정무 감독은 칠레와의 데뷔전, 투르크메니스탄과의 남아공월드컵 지역 예선을 마치고 이번 동아시아선수권대회를 실험의 차원에서 임할 뜻을 분명히 했다. 투르크메니스탄전 승리의 주역들인 이른바 ‘프리미어리거’가 모두 빠져나간 상황에서 A매치 경험이 부족한 다수의 선수들로 선수단을 꾸리게 된 감독으로서는 자연스런 선택이었을 것이다. 허감독은 월드컵 예선 경기들에 대비한 조직력 강화, 특히 국내파 선수들의 수비 조직력 향상을 강조했었다. 이렇게 실험에 중점을 두면서도 1위에 등극했으니 두 차례의 무승부에도 일단 흡족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대회를 치르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전력 누수가 발생했다. 해외파가 없는 가운데 조재진과 정조국마저 가세하지 못한 공격진은 박주영, 고기구가 대회 기간 중 차례로 부상 상태로 돌입해 극도로 얇아지고 말았다. 마지막 일본과의 경기에서 활용 가능했던 스트라이커는 경험이 일천한 조진수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인 견지에서 우리의 득점력에는 합격점을 부여할 만했다. 특히 세 차례에 걸친 경기에서 ‘매 경기’ 득점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우선, 중국전에 국한되기는 했더라도 박주영의 감각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를 향해 쏟아졌던 수많은 스포트라이트와 찬사에 비해 잦은 부상과 기대치에 미달하는 활약으로 곧잘 논쟁에 휩싸이기도 하는 박주영이지만, 그가 현재와 미래의 한국 축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능(혹은 적어도 그러한 재능들 중 한 명)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해외파가 가세한다 해도 전반적으로 공격진이 풍부하지 못한 허정무호에서 앞으로도 박주영은 실로 중요한 선수이다. 그는 좋아진 경기 감각을 곧 개막할 K-리그에서도 반드시 이어갈 필요가 있는데, 소속 클럽 FC서울에 새로이 합류한 데얀(전 인천)의 존재가 필경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염기훈의 ‘킬러 본능’ 돋보여

또한, 기본적으로 공격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일전 공격수의 역할을 부여받았던 염기훈이 ‘킬러 본능’을 발휘한 것도 희망적이다. 특히 염기훈은 해외파들이 가세했던 투르크메니스탄과의 경기에서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기에, 이번 동아시아선수권대회가 다시금 본연의 자신감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염기훈의 자신감 상승과는 다소 대조적인 것 가운데 하나를 언급하자면, ‘폭발적인 재능’으로 기대를 모아온 이근호가 이번 대회를 통해 좀더 도약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허정무 감독의 대회 후 평가에서도 드러났듯이,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조원희는 동아시아선수권대회 최대의 수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원희는 이번 대회에서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의 여러 가지 역할들을 꽤나 매끄럽게 소화했다.
오른쪽 측면 수비수로 더욱 잘 알려진 조원희는 이미 차범근 감독의 수원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경기에 나서 팀에 쏠쏠한 도움을 주곤 했지만, 국가 대표 무대를 통해 이 위치에서 수준급 플레이를 펼쳐보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원희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성실한 활동량으로 수비 라인 보호에 열심이었지만, 사실 더욱 눈에 들어온 것은 미드필드 최후방에서 볼을 나눠주는 그의 ‘패싱’이었다. 짧은 패스로 동료에게 볼을 건네주고 때로는 모험적인 긴 패스로 공격에 효과적으로 기여했던 조원희의 플레이는 어쩌면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그의 미드필드 파트너 김남일의 활약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오른쪽 측면 수비로서 ‘어정쩡한’ 모습들을 종종 연출하며 문제를 드러냈던 시절을 감안하면, 중원에서 조원희의 활약은 그 자신에게나 대표팀에게나 매우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그가 속한 클럽인 수원에는 백지훈, 안영학, 송종국, 박현범 등 중앙 미드필드 가용 자원이 많은 까닭에 앞으로 K-리그에서 조원희가 얼마나 이 위치에서 활약을 펼칠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도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의 조원희의 플레이를 틀림없이 감상했을 것이다.
박주영, 염기훈, 조원희가 공격과 미드필드에서 각각 희망적 활약상을 펼쳐보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번 동아시아선수권대회는 허정무호가 계속 담금질해 나아가야 하는 과제들을 여전히 남긴 대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실험의 핵심적 목표들 중 하나였던 수비 조직력 향상 면에서 이번 대회는 분명 합격점과는 거리가 있었다. 매 경기 득점포를 가동했던 반면, 매 경기 실점했다는 사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수비진의 집중력 문제 해결 시급

칠레와의 데뷔전 이래 허정무 감독은 스리백과 포백을 번갈아 들고 나오며 일관되게 수비 실험에 나섰지만, 어떤 시스템을 사용하느냐를 떠나 우선 수비진의 집중력 문제가 줄곧 해결되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실점들, 역습 및 흘러나온 볼에 의한 실점이 주류를 이룬다는 사실은 선수들의 집중력 결여 및 이와 연관된 반응 속도상의 문제를 내포한다.
또한 이번 대회는 포백을 효과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특정 선수들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포백 카드를 들고 나오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대회가 되었다. 수비 편향적인 곽희주와 이상호, 반대로 공격에 비해 수비가 불안한 박원재와 이종민이 현재로서는 모두 최적의 모습이 아니다. 이는 결국 이영표, 김동진, 오범석 등이 존재하지 않을 때 수비는 ‘무조건’ 스리백이 될 공산이 매우 큼을 의미한다. 특히 지난 시즌 포항스틸러스 우승의 1등 공신 박원재의 경우, 국가 대표 무대에서 더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더 나은 선수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스리백일 때든 포백일 때든) 측면에서의 수비력 강화 문제에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중앙 수비의 스피드, 조직력, 위치 선정, 판단력도 반드시 향상되어야 한다. 특히 이번 동아시아선수권대회의 총아로 떠오른 북한의 스트라이커 정대세에게 실점했던 장면이야말로 우리 수비의 문제들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라 하겠다. 물론 기본적으로, 두 명의 수비수 틈바구니에서 절묘한 슈팅까지 연결시킨 정대세의 능력 그 자체에도 박수를 쳐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상대 선수의 퇴장으로 수적 우위에 있던 상황에 걸맞은 효율적 수비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전술적 차원의 또 다른 문제이다.
수비력 제고의 필요성은 언론에 의해 ‘허정무의 황태자’라고까지 불리는 수비수 곽태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골 넣는 수비수’도 물론 팀을 위해 훌륭한 선수이지만, ‘골을 막는 수비수’가 먼저이다.
조원희, 김남일의 수준급 활약에도 불구하고 미드필드에서 공격에 기여하는 확실한 플레이메이커가 등장하지 않은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K-리그 정상의 선수 이관우가 대표팀에서는 여전히 잘 녹아들지 못하는 모습이며, 오장은 또한 이 역할을 100% 수행할 만한 스타일의 선수가 아니다. ‘미완의 대기’ 구자철은 아직 경험이 일천하다.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드필드 라인과 공격 라인 사이의 간격이 점점 멀어지는 현상도 여전히 나타났다. 이는 선수들의 체력과도 연관된 문제이며, 결과적으로 공격수를 고립시키고 효과적인 공격을 펼칠 수 없게끔 한다. 하지만 총체적인 견지에서, 이번 동아시아선수권대회는 막 닻을 올린 허정무호에게 좋은 ‘보약’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매 경기 골맛을 보았고 한 경기도 패하지 않으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경험이 적은 우리 선수들로 하여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게 하는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 물론 그 경험 적은 선수들이 값진 국제 무대 경험을 쌓은 것 자체가 적지 않은 소득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으로 허정무호는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곧 맞닥뜨릴 북한의 축구를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경험했다. 3월26일 경기에서 선전하는 우리 대표팀의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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