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잘해야 영어도 잘할 수 있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3.10 14: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번역가 이미도씨 / “영어 열풍은 허리병 같은 것” “나는 외국에서 영어 공부 한 적이 없다”
 
외국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면 ‘번역 이미도’라는 자막이 뜬다. 대박 난 영화에는 어김없이 나타난다. <반지의 제왕> <슈렉> <글래디에이터> <진주만> <클로버 필드> 등 굵직한 블록버스터는 영화번역가 이미도씨(48)가 번역했다. 지난 15년 동안 4백50편의 영화가 그의 손을 거쳤다. ‘최고 영화번역가’라는 닉네임이 붙은 이유이다. 그는 이 호칭이 과분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영화라는 특성 덕분에 얻는 덤이라고 생각한다. 외국 서적을 번역한 사람은 기억되지 않아도 영화 번역가는 잘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호칭이 부끄럽다”라고 말했다.
최근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영어 열풍을 그는 ‘허리병(hurry sickness)’이라고 표현했다. 이씨는 “너도 나도 영어, 영어 하니까 조급해져서 ‘영어 환자(English patient)’가 많이 생겼다. 우리가 한글을 단기간에 습득하지 않은 것처럼 영어도 시간을 두고 익혀야 한다. 영어 공부는 이 ‘허리병’을 고치는 것이 기본이다. 모든 국민이 영어에 열정을 쏟는데, 참 답답한 노릇이다”라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지난 2월 책을 냈다. 그의 세 번째 저서이다. 블로그도 개설했다. 2주 만에 23만명의 네티즌이 몰릴 정도로 블로그의 인기는 대단하다.
영화번역가의 대표 주자인 그는 외국에서 영어를 공부한 적이 없다. 대학에서도 영어가 아닌 스웨덴어를 전공했다. 그렇지만 그의 주변에는 우리나라 사람보다 외국 지인들이 더 많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저서와 블로그에서는 영어보다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말을 잘해야 영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자 신념이다.
최근의 영어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영어 박사로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 거액을 쏟아붓는다. 유명하다는 학원을 쫓아다니고 빚을 내서라도 조기 유학을 보낸다. 영어 박사를 만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영어가 성공의 열쇠라고 보기 때문 아닌가?
모든 취업 과정에서 영어는 지원자의 능력을 재는 척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실무에 영어가 쓰이는지 살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대부분은 영어와 무관하거나, 사용한다고 해도 그 빈도가 매우 낮다. 영어와 큰 관련이 없는 경리부에서 일하는 사람도 진급 시험을 볼 때 영어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고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온 나라가 맹목적으로 영어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어를 외면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닌 것 같다.
영어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그렇다. 잘하면 사는 데 조금 편할 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영어에 모든 열정과 돈을 투자한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나라 전체로도 얼마나 큰 낭비인가. 과거에도 영어 열풍이 있었다. 그런데 현재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아졌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기업이 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영어 박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도껏 하면 된다. 영어에 목을 맬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인이 유명 영어강사 수준까지 오르려고 하니까 문제이다. 영어가 밥벌이 수단인 사람처럼 영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영어를 잘하니까 그런 말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사실 나는 외국에서 영어를 공부한 적이 없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지도 않았다. 단지 아버지가 미군 통역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또 영어로 밥벌이를 하니까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순전히 영어를 독학으로 습득했다.
어떻게 공부했나?
어릴 때에는 변변한 영어 교재나 학원이 없었다. 그저 영어 동화책과 외화를 읽고, 보았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간 적이 있다. 한 2년 동안 머물렀다. 다 커서 갔으니 조기 유학도 아니다. 그나마도 가정사 때문에 중도에 귀국했다.
권하고 싶은 것은 영어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는 점이다. 영화도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자막만 보면 허탕이지만…(웃음).
영어 조기 유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영어를 어릴 때 접하면 좋다. 그렇다고 비싼 돈을 들여 유학까지 보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것도 단지 영어만 목적으로 유학을 한다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선택은 자유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조기 유학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너도나도 영어를 공부하니까 빚을 내서라도 아이를 외국에 보내려고 한다면 낭비이다. 목표를 세우고 영어가 필요한지를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이런 우려도 생긴다. 영어에 치중한 나머지 실무 능력을 키우는 데에 소홀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사학자가 되려는 사람이 역사보다 영어만 잘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럼에도 영어 공부 비법을 찾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는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영어 비법을 묻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단기간에 영어를 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매우 조급한 생각이다. 그래서 생긴 병이 ‘허리병(hurry sickness)’이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영어 환자(English patient)이다. 물론 내가 붙여본 말이다.
우리말을 어떻게 습득했는지 되짚어보면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 처음 우리말을 배울 때 받아쓰기와 말하기를 수십 번 수백 번씩 한다. 영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가?
오래 걸려도 그 방법밖에 없다. 음식을 급하게 먹으면 체하듯이 영어도 급하게 배우면 습득되지 않는다. 영어를 까먹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급하게 배워서 급하게 까먹는 것이다.
우리말을 익히듯 영어를 오랜 시간 익히면 몸에 밴다. 영어를 우리말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허리병’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바심을 내지 말고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꾸준히 1년만 투자해보라.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처럼 단어는 그 쓰임의 차이를 꼼꼼하게 따져가며 외워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단어가 사용된 좋은 예문과 함께 암기해야 한다.
영어만 잘하면 장래가 보장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물론 나처럼 영어로 밥벌이하는 사람은 장래가 보장될지도 모른다(웃음). 그러나 밥벌이로 영어를 활용하는 사람이라도 영어보다는 우리말을 더 잘해야 한다.
 

우리말을 더 잘해야 한다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바로 그 점이 핵심이다. 주변에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많다. 특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월등히 잘한다. 그러나 우리말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기업이 영어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미국인을 고용하는가. 영어는 물론 우리말을 잘하는 사람을 찾는다. 영어의 가치는 우리말을 잘해야 그 빛을 발한다.
한국 사람이니까 당연히 우리말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영어를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다.
기업은 영어 시험 점수가 높은 사람을 선호한다
영어 시험 점수를 높이는 것은 기계적으로 가능하다. 그 시험의 패턴이나 많이 나오는 문제 유형을 익히면 된다. 그러나 영어 시험 점수가 높다고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언어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문화나 정서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말로 표현하는 데 한계에 부닥친다.
예를 들면 은행 강도의 인질극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Hot dog afternoon>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국내에 처음 비디오로 소개될 때 <개 같은 날의 오후>라는 제목이 달렸다. 원래 의미는 1년 중 가장 더운 날이다. 여기에 우리말 정서를 넣어 표현하면 삼복 더위쯤 된다. 이 제목은 나중에 <뜨거운 오후>로 정정되었다.
최근 영어 관련 저서를 낸 것으로 안다.
지난달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라는 책을 냈다. 그동안 펴낸 <이미도의 등 푸른 활어 영어> <영화백개사전 영어백과사전>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영어보다 우리말을 잘 알아야 한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영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어를 공부하는, 특히 영어 번역 입문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상당히 많은 외화를 번역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 한 해 2백여 편의 영화가 수입된다. 나는 한 달에 1~2편 정도 번역한다. 우리나라에는 영화번역가가 20명 정도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 이름이 눈에 띈다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른바 블록버스터를 번역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노출된 것 같다. 또 이미도라는 이름에 받침이 없으니 외우기도 쉽고(웃음).
영화 번역은 어떻게 하고 얼마나 걸리는가?
영화 필름이 도착하기 전에 영어 대본만 보고 번역한다. 영화 속 모든 내용을 상상하며 번역한다. 필름이 도착하면 번역을 자막 처리해서 영상물 등급 심사용으로 제출한다. 심사가 끝나자마자 배급사는 영화 마케팅에 들어간다. 이때 시사회를 열어 오역을 찾고 수정 작업도 한다.
번역 시간은 넉넉하지 못하다. 보통 영화 한 편을 10일 정도에 번역한다. 그러나 여름 성수기용 블록버스터는 2~3일 만에도 초벌 번역을 마친다.
영화 번역에서 어려운 점은?
영화 한 편에 자막이 1천2백개 정도이다. 1분에 10개 정도이다. 매우 짧은 시간에 많은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한 자막에는 보통 8~10자 정도가 관객들이 읽기에 적당하다. 이 때문에 실제 배우가 말하는 것을 매우 압축해서 자막으로 전달해야 한다. 이 점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언제, 어떻게 번역 일을 시작했나?
군 제대 후 미국에 아는 지인이 영화를 우리나라로 보내는 일을 했다. 이를 받아 영화 배급사에 전달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우연치 않게 번역을 하게 되었다. 1993년 프랑스 영화 <블루>가 첫 작품이다.
영화 한 편 번역료는 얼마인가. 생활은 유지할 수 있나?
상영 시간이나 대작 여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략 1백50만원부터 5백만원 정도이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직업으로서 영화번역가는 외줄타기 인생이다.
번역가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
번역가에 대한 예우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 번역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문학이 노벨상을 받으려면 높은 수준의 번역은 필수이다. 그만큼 번역 수준을 높여야 하고 번역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인력도 많이 양성해야 한다. 영문학과에서 교과목으로 번역을 다루기는 하지만 대학에 전공학과도 없다.
앞으로 다른 일을 할 계획도 있는가?
영화 번역은 꾸준히 할 계획이다. 그러면서 글을 쓰고 싶다. 특히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이미 한 편을 썼다. <크리스마스 살생부>라는 제목인데 크리스마스 즈음에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액션·스릴러·판타지가 혼합되어 있다. 초고는 한 영화 작가가 쓴 것인데 내가 각색했다. 영화 관계자들이 검토 중인데, 잘 하면 영화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