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 될까, 권력의 새 축 될까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3.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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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각본대로’ 러시아 후임 대통령에 메드베데프 당선…“권력 투쟁 발발시 러시아 침몰” 등 전망 불투명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명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 부총리가 지난 3월2일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 후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메드베데프와 푸틴은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공부한 동창이지만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메드베데프는 대학 교수에서 정계에 입문한 선비형이고, 푸틴은 KGB에서 잔뼈가 굵은 잡초형이다. 상이한 성격의 두 지도자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러시아는 전에 없이 기이한 권력 동거시대를 맞았다. 오는 5월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취임해 푸틴을 총리에 임명하면 두 사람은 권력을 분점하게 된다. 차르 1인 지배에 맞서 피의 쟁탈전이 벌어졌던 러시아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러시아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러시아 정국은 푸틴의 각본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푸틴은 자신이 비록 총리직에 있더라도 지난 8년간 추진해온 강력한 러시아 건설의 꿈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해왔다. 따라서 푸틴 총리는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것이고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푸틴의 정책을 승계하는 꼭두각시가 될 공산이 크다. 푸틴은 러시아를 좌우할 만한 업적을 쌓았고,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8년간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경제를 재건했다. 러시아 경제는 2007년 7% 성장률을 기록했고 1999년 2천억 달러 미만이었던 GDP는 올해 1조 3천억 달러에 이르렀다. 고유가 덕분에 이런 성장이 가능했다는 분석이 있지만 푸틴의 개혁 드라이브를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이런 정치 환경 속에서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충복 노릇을 해왔고 그 덕분에 푸틴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메드베데프가 혹시 푸틴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지도력을 행사하려들 때 타협을 거부하는 푸틴이 이를 수용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카네기연구소 모스크바센터의 정치 분석가 릴리아 셰프초바의 전망은 매우 비극적이다. 만약의 경우 메드베데프와 푸틴 사이에 권력 투쟁이 생긴다면 러시아는 침몰할 것이라는 것이다. 크렘린의 정치 엘리트들은 향후 누구의 지시를 따를 것이며 누구의 결정이 러시아에 더 중요한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42세인 메드베데프는 선출직 공직을 담당한 적도 없고 권력 기반도 부실하다. 그로서는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터이다. 푸틴은 그렇게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문제는 이를 액면대로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메드베데프가 차라리 푸틴의 의중을 헤아려 그에게 사실상 ‘복종하는’ 대통령이 됨으로써 러시아를 안정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심지어 1~2년 후에 메드베데프가 중도 사퇴하고 푸틴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체념적 기대마저 나오는 판이다. 푸틴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두 번 이상 연임할 수는 없으나 3기 중임은 가능하다. 푸틴이 자신의 푸들 노릇을 해온 메드베데프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할 때부터 이런 시나리오는 널리 예상되었다.

 


푸틴은 자신이 총리가 되면 그동안 단순한 행정 수반이었던 총리 권한을 대폭 강화할 것임을 숨기지 않았다.. 메드베데프도 선거 다음날 기자 회견에서 자신과 푸틴은 서로 신뢰하는 사이로 강력한 러시아 건설에긍정적 요소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권력 구조에도 변화가 없을 것 같다. 메드베데프는 누가 외교를 담당하느냐는 질문에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수행한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바보 같은 질문이 선거 직후에 나온것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두 사람이 권력 공조를 아무리 강조해도 러시아 역사는 이를 보증하지 않는다. 그런 전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로 크렘린에는 두 개의 권력 축이 생겼다. 푸틴이 지난 8년간 구축한 권력에 다른 권력이 간섭하면 충돌은 불가피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굳이 그런 갈등이 있다면 대통령과 총리 사이가 아니라 두 사람을 둘러싼 세력 간에 있을 수 있다.
권력 투쟁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한마디로 메드베데프는 푸틴이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푸틴은 1990년대의 혼란기 이후 꾸준히 1당 체제의 권위주의를 강화했다. 그 강도가 너무 심해 스탈린 시대로 회귀한다는 비판까지 나올 정도였다.
메드베데프의 입에서 약간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선거 당일인 일요일 ‘붉은 광장’에 모인 수천명의 군중에게 푸틴의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우리는 함께 전진하고 함께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해 푸틴의 하수인으로만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그는 푸틴보다 더 자유주의적이고 친 서방적이다.
최근 연설에서는 자유의 이상을 부활하고 법치주의를 준수하겠다고 말했다. 기회가 되면 푸틴의 색깔을 버리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궂은 겨울비가 내려 러시아의 장래를 걱정하는 국민의 불
안한 심정을 상징하는 듯했다. 온건한 성격을 지닌 그는 푸틴의 권위주의를 완화하고 언론 자유와 인권도 개선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럴 경우 푸틴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는 그런 상황을 의식한 듯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 방어망을 설치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코소보의 독립에도 반대한다고 했다. 푸틴의 정책을 답습하겠다는 의사표시이다. 결론적으로 노선은 온건하지만 기본 정책은 푸틴의 그것과 같다는 얘기이다. 그가 혹시 용단을 내려 푸틴의 의사에 반해 시민사회의 자유를 활성화하는 극적인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갈려 있다.

당분간 푸틴의 권력 유지될 듯…흐루시초프의 전철 밟을까 우려도

역사학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 옐친 시대에 나타난 권력의 반역 내지는 역작용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으나 브레즈네프 시대의 경제 파탄을 초래했다. 옐친은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푸틴의 권위주의를 잉태했다. 고르바초프는 KGB의 공산주의 프로젝트를 이행하기 위해 권력을 이어받았으나 엉뚱하게 개방과 개혁으로 진로를 바꾸어 자유의 꽃을 피웠다.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선택한 푸틴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리고 메드베데프가 흐루시초프의 전철을 밟는다면 푸틴과 러시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최대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가 대체로 외부 세계의 예상과는 달리 움직였던 과거 역사를 감안하면 큰 이변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아울러  러시아 사회가 대체로 많이 성숙했다는 사실도 그런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푸틴은 메드베데프를 당선시키기 위해 야당 후보 3명의 선거운동을 사실상 봉쇄했다. 유럽연합의 선거감시위원들조차 모니터를 거부당했다. 한 야당 후보는 이 선거를 ‘소극(笑劇)’이라고 비꼬면서 소송을 하겠다고 별렀다. 그러나 다 부질 없는 일이다. 푸틴은 그의 각본대로 게임을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적어도 당분간  푸틴의 의사와 상충되는 이변은 기대하기 어렵다. 선거를 앞두고 푸틴의 행보를 놓고 벌어진 공방은 일단 막을 내렸다. 계속 권력을 장악할 것인지 총리를 마지막으로 권력 일선에서 물러날 것인지는 전적으로 푸틴의 마음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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