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진실을 잃었네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 승인 2008.03.17 11: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스트리아의 유명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189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인간의 포장된 모습과 이중성을 심리적으로 날카롭게 꿰뚫은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 그의 삶도 병적이었다. 작가로 성공해서 부와 명성을 얻었는가 하면, 이후 도박과 낭비로 나락의 끝을 수없이 오갔다. 여성 편력도 화려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대표작을 역설하기라도 하듯, 평생 써온 자신의 일기를 자신이 죽은 40년 후에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한때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각광받던 이호성씨(41)의 살해 및 자살 사건을 접한 국민은 당혹감과 허탈감에 빠져 있다. 이씨와 이씨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김 아무개씨(여·46) 및 세 딸은 온갖 의혹만 남겨놓은 채 모두 생을 마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진리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순간이다. 사건의 실체를 명확히 알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번 사건을 수사한 마포경찰서측은 “김씨 모녀 살해 사건은 돈을 목적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이씨의 단독 범행으로 밝혀지고 있다”라고 결과를 정리했다. 수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계속 의문이 제기되자 경찰은 “남아 있는 의혹에 대해 추가 수사를 하겠다”라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으나, 사실상 수사는 마무리 수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김씨 유족들은 반발하고 있다. 초동수사에 미흡했던 경찰이 이씨의 죽음을 계기로 이제 마무리까지 대충대충 하려 한다는 불신감이 팽배해 있다. 경찰을 불신하는 시선은 광주에도 있다. 2005년 광주에서 이씨와 만난 직후 실종된 채 지금껏 소식이 없는 조 아무개씨(실종 당시 36세)의 가족이다(46면 기사 참조). 그들은 당시 경찰이 조씨의 실종을 단순 잠적으로 처리했다고 분노하고 있다.


사망한 이씨와 김씨의 주변 인물 탐문 수사 더 해야

수사 전문가들도 이번 사건이 경찰의 발표로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좀더 명확한 규명을 위해 ‘제3의 인물’을 찾아야 한다”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미 사망한 이씨와 김씨의 주변 인물을 더 탐문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최대 의혹은 범행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한다. 경찰은 “이씨가 김씨의 전세금 1억7천만원을 노리고 사전에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운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수백억원의 빚을 떠안고 있는 이씨가 과연 1억7천만원 때문에 그런 엄청난 범행 계획을 세웠겠는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이 부분에서 이번 사건이 다툼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저간의 속사정이 이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 정년퇴임한 안흥진 전 경위는 “여러 정황을 볼 때 살인은 이씨 혼자서 저지른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직접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범행을 돕거나 은닉을 도와준 공범의 존재 가능성은 다분하다. 돈 문제와 얽혀 있는 관계인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씨가 평소 호남 지역의 주먹들과도 친분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제3의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안씨는 현역 시절 조폭 및 강력 수사의 대명사 격으로 통했다.
강력계에 오래 몸담은 서울 한 경찰서의 백 아무개 형사는 “이미 피해자인 네 모녀의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준 이씨가 사건 유력 용의자 1순위로 지목될 것이 뻔한 상황인데도 알리바이 하나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다분히 우발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그는 “그것이 아니라면 이씨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시켜 줄 제3의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실제 범행에서 우발적인 것과 계획적인 것을 확연히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이씨의 경우에도 애초 범행에 대한 뜻은 갖고 있었다가 갑작스런 다툼에 의해 당초 예상보다 더 빨리 실행에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이씨가 이미 네 모녀를 통해서 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리게 한 점과 김씨에게 사전에 돈을 전달받는 과정 등을 보면 나름대로 범죄에 대한 계획을 준비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씨가 살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면 그 이후의 방법으로 해외 도피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부분에서 이씨의 밀항 계획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씨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지난 2월18일 서울 광화문의 한 여행사에 파라과이행 여행에 대해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씨는 이미 다른 7건의 사기 사건 등으로 출국금지된 상태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외 출국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의문은 또 남는다. 사건 이후 이씨는 1억7천만원 가운데 1억원을 형과 지인들에게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도피자금으로 상당한 현금이 필요했을 법한 상황에서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표교수는 “사건 후에 해외 도피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듯하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경찰이 관심을 갖고 찾고 있다는 말만 들어도 범죄자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형과 지인들에게 돈의 일부를 나눠준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체념 상태에서 자살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추정했다.
전문가들의 추정을 종합해보아도 이씨는 범행 전후 과정에서 누군가와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하거나 도움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면에서 사망 직전까지 이씨와 함께 있었던 또 다른 내연녀인 차 아무개씨가 주목되고 있다. 그녀는 이씨가 자살하기 직전인 사흘 동안 함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마포경찰서의 ㄱ주임은 “차씨에 대해서 집중 조사했지만 이번 사건과의 직접적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라고 밝혔다.


남은 돈 7천만원 행방 찾는 것이 사건 실마리 풀 열쇠

남은 돈 7천만원의 행방을 찾는 것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 열쇠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돈이 특정인에게 건네졌다면 그가 제3의 인물일 가능성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ㄱ주임은 “피해자 김씨가 1억7천만원을 모두 현금으로 찾았기 때문에 수사에 어려움이 많다”라고 토로했다.
서울 창전동 아파트 지하 주차장 CCTV에 찍힌 인물에 대한 궁금증도 여전히 남아 있다. 경찰은 “주변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걸음걸이 스타일이 이씨와 흡사하다고 한다”라며 그가 이씨인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하지만 경찰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CCTV의 화면만 가지고 특정인으로 단정 짓기는 사실상 어렵다. 경찰은 이 화면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판독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수사 전문가들은 “이씨가 범행 이후 자살하기 전까지 20여 일간 사용한 휴대전화의 통화 내역을 면밀히 추적해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ㄱ주임은 “현재 그 부분을 수사 중에 있다. 그런데 이씨가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통화를 공중전화로 이용하는 등 주도 면밀하게 움직였다”라고 덧붙였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피해자 김씨의 승용차 안에서 여러 개의 지문이 감식되었는데, 거기에는 이씨의 지문도 있었지만 라이터에서 또 다른 사람의 지문도 감식되었다고 한다. 이씨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이에 대한 질문에 “차 안에서 수많은 지문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는 세차원의 지문도 있다”라며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찰은 나름으로 최선을 다한 수사였고, 그 답도 충실하게 내놨다고 자평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영원한 ‘미제 사건’의 상징으로 남을 듯하다. 하지만 반전의 가능성은 아직 열려 있다. 3년 전 조씨 실종 사건이 이번에 다시 파헤쳐지는 것처럼. 슈니츨러의 소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에는 선입견을 뒤엎고 예상치 못한 결말을 이끌어내는 극적인 반전의 묘미가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