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스피드와 모험을 충전하라
  • 한준희 (KBS 해설위원) ()
  • 승인 2008.03.31 12:0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밀집 수비만 만나면 무기력증 보이는 한국 축구 대표팀의 해법

 
남북 대결’이라는 특수성이 긴장감을 자아내기는 했으되, 그 특수성의 요소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답답한 90분이었다. 2010 남아공월드컵을 향한 대한민국의 두 번째 항해는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0 대 0 무승부로 귀결되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팀 스피드’였다. 전력의 우세에도 한국은 경기 내내 ‘팀 스피드’를 적절히 끌어올리지 못했고 이는 한 발짝 더 뛰는 강인한 수비력을 펼쳐보인 북한을 무너뜨리지 못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팀 스피드’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우선 물리적으로 빠른 선수들이 존재해야 한다. 모든 선수들이 다 역동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지만, 역동성과 순발력을 갖춘 선수들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 패스 연결의 속도다. 볼이 그라운드 안에서 빠르게 돌아다녀야만 ‘팀 스피드’를 높일 수 있다. 이와 연관된 맥락에서, 선수들의 ‘두뇌 회전’과 ‘눈’이 빠를 필요가 있다. 이는 동료의 움직임과 위치에 대한 신속한 파악 및 다음 플레이를 만들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다.
날카로운 역습을 꾸준히 선보였음에도 근본적으로 북한이 5-4-1(공세시에는 3-4-3)에 가까운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에게 ‘팀 스피드’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 경기에서 우리가 ‘팀 스피드’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대부분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박지성과 후반전 투입된 염기훈 정도를 제외하면 팀에 역동성을 불어넣을 만한 선수들의 수가 부족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실전 활약이 너무 부족한 설기현은 자체로 신체 리듬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K-리그에서 득점포를 가동하기는 했더라도 조재진과 박주영은 그리 빠른 선수들이 못 된다. 심지어 박지성과 이영표도 대승을 거두었던 투르크메니스탄전과 비교하면 다소간 떨어지는 몸놀림을 선보였다. 결국 총체적인 역동성의 저하가 필연적으로 초래되었고, 이는 북한의 투쟁적 밀집 수비를 파괴하지 못한 결과를 야기했다. 후반전 염기훈을 투입해 스피드를 높인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지만 북한의 스타일을 감안할 때 조재진과 박주영을 동시에 선발 기용했던 구상에는 약간의 재고가 필요하다.

‘패스 앤드 무브’에 의한 부분 전술 절실
역동적이지 못한 움직임에 더하여, 느린 패스 타이밍과 느린 판단들 또한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밀집 수비를 무너뜨리기 위한 유력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역시 신속한 ‘패스 앤드 무브(pass and move)’에 의한 부분 전술이다. ‘주고, 들어가고, 받는’ 약속된 플레이를 빠르게 전개할 때 밀집 수비가 궤멸될 확률이 커지는 법이다. 하지만 북한과의 대결에서, 효율적인 공간 침투의 부족은 물론이거니와 한두 차례의 간결한 터치에 이은 위협적인 패스 플레이를 자주 보기란 어려웠다. 이것은 동료의 움직임을 미리 시야에 넣어두고서 다음 플레이를 신속히 전개하지 못한다는 사실과도 맥을 같이한다. 볼을 잡고 난 후 두리번거리며 동료를 찾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근접해 있는 북한 선수의 방해를 피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오히려 홍영조, 김영준, 문인국, 정대세를 앞세운 북한이 적은 수의 공격 빈도였는데도 위험 지역에서 더 날카로운 패스 플레이를 선보이며 우리의 수비를 위협했다. 북한 선수들은 동료의 움직임과 위치를 미리 알고 있다는 듯, 원터치, 투터치에 의한 빠른 타이밍의 패스를 성공적으로 구사했다. 물론 이것은 손발을 오래 맞춘 그들의 조직력의 산물이기도 할 것이다.
‘팀 스피드’의 문제 이외에도, 아시아 팀들과의 경기에서 노출되곤 하는 우리 대표팀의 ‘밀집 수비에 대한 무기력증’은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밀집 수비로 나오는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모험적인’ 플레이가 요망된다. 모험적인 패스, 모험적인 드리블, 모험적인 부분 전술이 시도될 때 상대 수비가 혼란에 빠질 확률은 그만큼 높아지며, 적어도 상대의 반칙을 얻어내는 것으로써 좋은 위치에서의 프리킥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대표팀은 밀집 수비로 나오는 상대를 맞아 충분한 모험심을 발휘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 우리 선수들은 상대를 가까이에 등진 상황에서 전방을 향해 돌아 뛰는 움직임을 시도하려 하기보다 볼을 후방으로 보내려는 경향이 강하다(박지성의 경우는 다소간 예외다. 박지성은 전방을 향한 공격적인 턴(turn)을 즐긴다).

백패스 줄이고 과감한 패스·드리블 펼쳐야
물론 모든 백패스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달려 들어오는 동료의 슈팅을 돕기 위한 백패스, 더 적절한 공격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백패스는 매우 좋다. 하지만 북한전에서 있었던 상당수의 백패스는 밀집 수비를 파괴하기 위한 ‘모험심’이 결여된, 소극적인 의미의 백패스였다. 볼 점유율 면에서의 커다란 우세가 위협적인 슈팅 수, 프리킥 수로까지 연결되지 않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번 북한과의 무승부는 대표팀이 안고 있는 근본적 불안 요인 한 가지를 드러내보인 경기가 되었다. 다름 아닌 이른바 ‘프리미어리거’ 중심의 해외파 선수들에 대한 의존도의 문제다.
경기의 상대성 및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박지성, 설기현, 이영표 등 프리미어리거들의 컨디션이 양호했던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 한국의 전력은 충분히 강해 보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언급했던 바, 프리미어리거들의 상태가 언제나 좋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의 그 어떤 선수가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한 유럽 빅리그에 진출하든지 간에, 그곳에서 규칙적인 기회를 보장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비단 우리 선수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적 명성의 스타들조차 빅리그의 살벌한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조금만 상태가 좋지 않아도 경쟁자가 치고 올라오거나 새로 영입된다. 그런데 축구에서 규칙적으로 플레이하지 않을 경우 해당 선수의 상태는 나빠지기 마련이다. 오래도록 플레이하지 않으면서 쉬고 있는 것이 체력에 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축구선수는 혹사당하지 않는 한도에서 규칙적으로 플레이하고 있을 때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결국 프리미어리거들의 컨디션이 하락하는 시점에서 벌어진 북한과의 경기에서 우리의 공격 창조성은 심각하게 감퇴했다. 문제는 이들의 몸 상태가 100%가 아님에도 이들에게 너무 많은 일이 맡겨졌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전반전에 나름의 분투를 펼쳤던 박지성은 주변 동료들의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측면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던 동료들의 스피드와 움직임 부족이 이러한 현상에 한몫했다.
프리미어리거들이 지금의 한국 대표팀의 선봉에 서 있으며 팀의 전체적인 수준을 끌어올려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팀의 운명이 프리미어리거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무 많이 좌우되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허정무 감독의 앞으로의 선택의 폭은 이번 북한전에서 활약한 선수들에 국한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김동진, 이천수, 이근호, 이청용, 안정환 등 이번에 선발되지 못했거나 혹은 기용되지 못한 카드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어쩌면 이러한 카드들은 대표팀의 프리미어리거 의존도를 낮추는 데 도움을 줄 법한 선택지들이다.
한편, 우리를 상대로 최근 세 경기 연속 무승부에 성공한 북한은 비록 ‘선수비 후역습’의 기본 형태를 운용했지만 녹록치 않은 경기력으로써 다크호스의 잠재력을 입증했다. 특히 세르비아리거 홍영조의 다재다능함과 공격과 수비의 출발점인 중앙 미드필더 김영준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우리의 견제가 정대세 쪽으로 집중되는 사이, 2선에서 파고든 미드필더들의 플레이와 이들을 겨냥한 패스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마무리 슈팅의 부정확성 및 두텁지 않은 선수층의 문제 등이 앞으로의 월드컵 행보에서 북한을 괴롭힐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