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강탈해간 조상 땅, 정부가 또 빼앗다니”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 승인 2008.04.1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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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선생 후손들, 이전 등기 청구소송…정부 “국가 소유, 못 돌려준다”

 
한국 사회에서 독립운동가는 배고픔의 상징이다. 독립운동가 후손들 하면 가난과 고통의 대물림이 떠오른다. 반면 친일파의 후손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막대한 재물과 권력을 얻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하고, 친일파 집안은 3대가 흥한다’는 말은 그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는 아직 독립이 찾아오지 않았다.
정부는 2005년 12월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친일파 재산을 환수해서 독립유공자들을 위해 쓰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정부의 친일 청산에는 이중성이 엿보인다. 친일파의 재산 환수에 나서면서 정작 국가에 귀속된 독립유공자의 재산 반환에는 소극적인 모습이다. 친일파 후손들은 지난 1980년대 말부터 국가에 귀속된 땅을 되돌려달라며 쉴새없이 소송을 벌였다. 그 정점에는 친일파의 거두인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들이 있었다. 2005년 ‘친일재산 환수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승소율이 50%에 달했다. 10건 중 5건의 땅은 친일파 후손들의 수중으로 다시 넘어갔던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은 친일재산환수법에 의해 국가 귀속이 결정된 토지에 대해서도 부당하다며 소송을 내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한 애국지사 민영환 선생의 후손들은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에 울분을 토하고 있다. 민영환 선생의 셋째아들 고 민광식씨의 자녀들은 여러 곳에 산재한 민영환 선생의 자료들을 모으다가 상속받은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국가에 귀속된 땅이었다. 민병섭씨를 비롯한 자녀 4명은 지난해 8월9일 서울중앙지법을 통해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을 냈다.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일대 4천2백여 ㎡ 토지(공시지가 8억여 원)가 1912년 토지 조사 당시 부친의 소유지로 인정받은 땅이므로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의 해당 토지는 의정부교도소 옆에 위치한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안에 있는 땅이다. 일제 토지 조사 당시에는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였다가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가기록원이 보존하고 있는 일제 시대 토지조사부에는 해당 토지가 민광식씨 소유로 기록되어 있다. 민영환 선생이 광식씨에게 상속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국가에 귀속되었으므로 반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6민사부에 제출한 답변서에는 1938년 7월4일 이강문이라는 사람이 매입한 후 1940년 9월10일 일본인 별부장태랑에게 매매했고, 1945년 3월26일 경성전기주식회사 취제역 사장 수적진육랑과 경성형무소 간 부동산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인사과장이던 별부장태랑 명의로 있던 해당 토지도 포함되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와 경성형무소는 소유권 보존 절차를 밟으려 했으나 8·15 광복과 6·25 전쟁 등으로 인해 등기 절차를 이행하지 못하다가 1961년 2월14일 국가로 소유권 등기를 마쳤다고 한다.
 

일제 토지조사부·정부 등기부 등 여러 곳에 조작 흔적

<시사저널>은 일제가 만든 토지조사부, 정부 등기부, 토지 계약서 등 관련 서류를 입수해서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러 곳에서 조작 증거가 발견되었다. 우선 등기부등본 양식이 일제 시대에 사용했던 양식과 확연하게 달랐다. 정부가 제출한 토지 등기부등본에는 표제부와 갑구를 한 면에 표시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양식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등기부의 소유자 주소를 보면 이강문과 별부장태랑의 주소가 ‘서울특별시’로 명기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의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949년 8월15일 지방자치법이 시행된 이후다. 그런데도 이강문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가 접수된 연도는 단기 4272(1939년)이고, 별부장태랑의 이전 등기가 접수된 연도는 단기 4273(1940년)이다. 모두 서울특별시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문서가 조작되었다는 의심이 들 만하다. 양 소유권 이전 등기 접수일이 1년8개월 정도 차이가 나는데 필체가 같은 것도 문서의 진위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이다. 1945년 3월26일 작성된 경성형무소의 소장 도변풍과 경성전기주식회사 취제역 사장 수적진육랑 사이의 계약서에 별부장태랑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별부장태랑이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직원이었다고 해도 별부장태랑의 토지를 회사의 토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별부장태랑이 경성전기주식회사의 명의 수탁자라면 그 증명이 있어야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교환 계약서에는 갑과 을의 날인이 없고 별지의 토지 목록은 타자로 작성되었다. 반면 계약서는 수기로 작성되었으나 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교환 계약서와 별지 토지 목록은 동일한 서류라고 할 만한 근거가 약하다. 국가 기관과 기업이 계약을 체결하면서 공식 서류 대신 조잡한 계약서를 사용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교환 계약서와 권리증서에 첨부된 토지 목록 하단에는 마포형무소라는 표기가 눈에 띈다. 경성형무소가 마포형무소로 개칭된 것은 1946년 4월7일이다. 계약서가 작성되던 1945년 3월26일은 마포형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즉 상기 계약서가 광복 이후에 작성된 문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소송 대리인인 P&P법률사무소 김형남 변호사는 “일제 치하의 경성형무소와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계약서 원본이 존재하지 않고 그 계약서에 첨부된 토지 목록의 원본 또한 존재하지 않아 계약 자체의 진실성조차 의심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1950년 5월10일 의정부지방법원 의정부등기소에서 발급받아 보관해오던 그 등기부본은 원본과 동일하다. 1945년 3월26일 교환 계약서에 경성형무소장 도변풍과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취체역 사장 수적진육랑 등은 서명 수기 날인을 하였기에 타자로 토지 목록을 첨부했다고 해도 적법·유효한 서류다. 서울특별시 명칭은 의정부등기소 서기관이 1950년 이전 등기부를 당시 양식으로 옮겨 작성한 것이어서 서울특별시로 표기된 것이다. 조작 가능성은 없다”라고 해명했다.
이 사건의 최대 미스터리는 해당 토지가 어떻게 해서 제3자인 이강문에게 넘어갔느냐는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관련 서류 어디에도 민광식씨가 제3자에게 토지를 매매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즉 이강문이라는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해당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다.
민영환 선생 후손들은 일제나 친일파들이 강탈했다고 믿고 있다. 실제 일제 강점기에 애국지사나 독립유공자 재산의 상당수는 일제와 친일파들이 강탈해갔다. 해방 후에는 원주인인 독립운동가에게 돌아가지 않고 국가에 귀속되는 절차를 밟았다. 민영환 선생은 명성황후의 조카로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였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당시 토지조사부를 보면 민영환 선생의 재산은 세 아들에게 상속한 토지만 해도 60여만 평에 달했다. 이를 근거로 후손들은 더 많은 재산이 있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 대표적인 토지가 부평 미군기지다. 부평 미군기지는 기록으로 보아 민영환 선생 일가의 ‘목양사’라는 목장으로 친일파 송병준에 의해 강탈당했다. 송병준은 당시 민영환 선생의 식객이었던 오신묵과 모의해 민영환 선생의 땅을 강탈했다. 이는 당시 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기록이 남아 있다. 민영환 선생의 부인이 송병준과 벌였던 송사의 판결문도 현재 남아 있다. 송병준의 증손자 7명은 지난 2002년 9월 부평구 산곡동의 토지 40여만 ㎡(공시지가 약 3천억원)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민영환 선생의 후손 17명도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 민광식씨의 차남 병건씨는 “등기부에 등장하는 수적진육랑과 도변풍 등은 일제 패망 직전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애국지사들의 재산을 약탈한 인물들이다. 정부가 조사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나라가 위급할 때 독립운동 한 것이 무슨 죄인가.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홀대하면 어느 누가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국가에 귀속된 독립운동가의 땅을 찾아주는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영환 선생이 자결한 후 후손들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일제와 친일파들의 감시와 탄압으로 출세길이 막혔다. 후손들은 지금까지 변변한 재산 없이 전·월세를 전전하며 어렵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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