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삽질’에 살 파먹히는 무방비 북한산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 승인 2008.04.2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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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관 보호지역인 북한산 구기동 자락 호화 빌라촌 개발 과정에 편법·불법 논란

20 년 이상 이곳에서 살았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다. 멀쩡히 살아 있는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지난 4월14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23×번지 부근에 거주하는 한 주민이 한 말이다. 북한산 국립공원 자락에 위치한 구기동은 현재 자연경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의 허파 노릇을 하는 이곳 일대는 그동안 개발이 엄격하게 제한되어왔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이곳 풍경이 변하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들어선 호화 건축물이 이제는 고급 빌라촌을 형성하고 있다. 국내 최고의 부촌으로 꼽히는 서울 성북동이나 한남동 못지않은 위용이다.
이 과정에서 각종 편법·불법 개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구청에 등록된 것보다 규모를 늘려 주택을 건축하거나 증축하는 것은 기본이다. 건물 신축이 금지된 곳에 버젓이 2층 규모의 현대식 주택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근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이같은 주택은 건축물 대장에도 없는 불법 건축물이다. 그럼에도 관할 구청은 정확한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날 기자가 찾은 곳도 개발업자의 불법 건축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등산로 초입에 위치한 1만5천여 ㎡(약 4천7백 평)의 부지에는 잣나무와 소나무 수십 그루가 허리가 꺾인 채 나뒹굴고 있었다. 이미 상당수의 나무가 베어진 듯 뿌리만 남아있는 모습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 자리를 급조한 듯한 받침대에 의지한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등산로 초입 1만5천㎡ 부지 개발하다가 구청에 덜미

맞은편인 이북오도청 위에서 보면 이같은 모습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울창해야 할 산자락 한쪽이 구멍이 나다시피 파져 있다.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등산객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혀를 차고 지나간다. 이곳에서 30년간 살고 있다는 주민 김 아무개씨는 “일부 대기업이 이 땅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개발이 묶이면서 개인에게 매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개발이 진행되었지만 구청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에 따르면 이곳은 과거 옛 한일은 행과 현대산업개발 등이 보유하고 있던 땅이었다. 한일은행의 경우 지난 1970년대 말 개인에게 택지를 분양해 한일단지로 개발을 마쳤다. 그러나 현대산업개발은 1종 전용 주거지역에 위치해 있고 나무가 많아 개발조차 하지 못했다.
이 회사는 결국 지난 2001년 개인에게 이 땅을 매각했다. 이 땅이 다시 여러 차례 매각되면서 각종 투기 세력의 공략지가 된 것이다. 김씨는 “매각 가격만 1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땅값에 거품이 끼다 보니 단속의 손길을 피해 불법적인 개발 시도가 끊이지 않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관할 구청인 종로구청측은 “우리도 몰랐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찬종 공원녹지과 주임은 “마을 주민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가보니 나무들이 모두 베어져 있었다. 땅주인을 경찰에 고발한 뒤 베어낸 나무는 모두 원상 복귀시키도록 지시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의 입장은 다르다. 구청에서 개발을 묵인해주었기 때문에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 아니냐고 말한다. 이곳 주민들은 개발업자가 구청 이름을 사용해 공사를 했던 점, 구청이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조치를 미루었던 점 등을 들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종로구청 이름으로 ‘소나무 재선충 작업 중’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린 후 아름드리 나무가 대부분 베어졌다. 구청에 서 이같은 상황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구기동에 호화 빌라가 하나씩 생길 때마다 정권 실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우리는 종로구청의 묵인 하에 개발이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구기동 빌라촌에는 그동안 정권 실세가 상당수 거주해왔다. 문민정부 때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홍문종 전 한나라당 의원,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 박준규 전 국회의장 등이 이곳 빌라에 거주했거나 현재도 거주하고 있다.
문제의 부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건덕빌라의 경우는 지어진 경위 자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이 빌라는 애초에 증·개축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락방을 포함한 3층 건물이 어느 날 갑자기 세워지면서 정권 실세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실제로 지난 1993년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은 이 빌라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면서 민자당 탈당에 이어 국회의장직까지 내놓아야 했다. 빌라 바로 위쪽에 위치한 혜림정사의 한 관계자는 “지형상으로 빌라 건축이 불가능한 곳이다. 당시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빌라 건축이 강행되면서 정권 차원의 비호 의혹이 일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귀띔했다.
건축 과정에서도 뒷말이 적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건축 허가가 났지만 구청에서 허가받은 규모보다 크게 지어져 건축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된 것이다. 그러나 준공 허가도 나지 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박준규 전 의장을 포함한 12가구가 이 빌라에 입주한 것이다.

 

“담당 공무원 징계 절차 진행 중”

물론 이 사건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사퇴하면서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 후부터 이곳에서는 고급 빌라 건설 붐이 일었다. 현대그랜드빌, 데스때빌리지, 풍림빌라 등이 북한산 자락에 아무런 제재 없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은 “고급 빌라가 하나씩 들어설 때마다 누가 뒤를 봐주었다는 등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구기동 23×-1번지와 23×-2번지 땅도 같은 맥락에서 의혹을 받고 있다. 실제 현재 종로구청에는 관련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담당 공무원의 징계 문제도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해 종로구청측은 “업무상의 미숙에 따른 징계 조치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라고 해명했다. 구청 관계자는 “훼손된 부지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샀기 때문에 현재 징계 절차가 진행 중이다. 개발업자와의 유착이나 비리가 드러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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