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때도 없는 내 손안의 오락실
  • 반도헌 기자 bani001@sisapress.com ()
  • 승인 2008.04.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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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면서 오락을 즐기는 ‘손바닥 문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휴대전화, PMP, 휴대용 게임기 등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만의 ‘오락실’을 만드는 실태를 집중 취재했다.

 
요 즘 사람들은 길을 걷거나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짧은 시간에도 무언가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찾는다. 이제 지하철, 커피숍, 공원 등지에서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모바일 게임에 열중하거나 DMB 방송을 즐기고, PMP에서 흘러나오는 동영상 강의에 열중하고, 스타일러스 펜을 들고 열심히 닌텐도DS 화면을 누르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손에 포터블 기기 하나쯤 들고 있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낄 정도다.
길 위에서 오락을 즐기는 일명 ‘손바닥 문화’가 활짝 펼쳐지고 있다. 누구나 휴대전화, PMP, 휴대용 게임기 등을 주머니나 가방 속에 넣고 다니다가 꺼내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자신만의 ‘오락실’을 만들 수 있다.
‘길 위의 오락실’은 양손(때로는 한 손만 필요할 때도 있다)과 포터블 기기, 이어폰·헤드폰만 있으면 충분하다. 머리에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손 위에 올려진 조그만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아무리 사람이 많고 번잡한 곳이라도 서 있을 공간만 확보하면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불편함도 주지 않으면서 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화된 현대인의 생활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출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에서도 종종 PMP를 이용해 동영상을 즐기곤 한다는 김정민씨(32)는 “좁은 공간이라도 얼굴 위로 손 올릴 공간만 있으면 불편함 없이 볼 수 있다. 아침에 쏟아지는 무가지를 펼쳐본다면 옆 사람에게 폐를 끼치겠지만 PMP를 보는 것은 조금만 주의를 한다면 그런 문제를 피할 수 있다. 의도하지 않게 들리는 주변 사람들의 대화와 지하철 소음을 차단해준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라고 말했다.

각자 ‘길 위의 오락실’에 빠져 걷는 연인도 종종 목격

방과 후에 같이 하교하는 학생들이나, 커피숍에 마주 앉아 있는 연인들이 각자 ‘길 위의 오락실’을 펼치고 대화 없이 나름의 유희를 즐기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지하철에서 만난 한 중학생은 “여러 명이 모였을 때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각자 포터블 기기를 가지고 노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워크맨, 휴대용 라디오, CD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 등 예전의 포터블 기기는 주로 음악을 들려주는 장치였다. 그 시절에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주로 책, 신문, 잡지 같은 인쇄 매체가 담당했다. 포터블 기기를 이용해 e-book, 뉴스, 만화책 등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인쇄 매체의 기능이 많이 대체되고 있다. 인쇄 매체에 익숙한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e-book보다는 종이 책 보기를 선호하지만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조금 작을 뿐인 포터블 기기 화면을 즐긴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한 손에 포터블 기기를 들고 있는 겉모습은 닮아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즐기는 콘텐츠는 모바일 게임, 지상파·위성 DMB, 미드·영화·뮤직 비디오 등 영상 오락물, 동영상 강의 등 다양하다.
휴대전화는 ‘길 위의 오락실’ 대중화의 선두 주자다.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한 많은 유희는 휴대전화를 통신 기기를 넘어선 오락 기기로 변형시켰다. 테트리스, 고스톱 등 퍼즐 보드게임으로 출발한 모바일 게임은 스포츠, 액션 아케이드, 롤플레잉게임(RPG), 타이쿤(운영하거나 캐릭터를 키우는 게임 장르) 등 여러 장르의 다양한 콘텐츠들이 인기를 얻으며 크게 성장했다. 문자메시지 보내기의 달인들이던 엄지족들이 이제는 모바일 게임에 엄지의 내공을 싣고 있다.
모바일 게임은 엄지족으로 대변되는 청소년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고스톱 게임 같은 경우에는 남녀 노소가 따로 없다. 그래도 세대, 성별에 따라 선호하는 장르는 다르다. 모바일 게임업체 게임빌의 홍보팀 담당자는 “10대는 다소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임무를 완수하는 성취감이 있는 RPG 게임을 선호하고 20대는 액션 아케이드, 30대는 야구나 테니스 같은 스포츠 게임을 선호한다. 성별로 분류하면 남자는 활동적인 스포츠나 액션 게임을, 여성은 타이쿤이나 아케이드를 선호한다. 고스톱, 바둑, 스도쿠 등의 퍼즐 보드게임은 특정 세대와 성별에 관계없이 사랑받는다”라고 밝혔다.
DMB 역시 휴대전화를 이용해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다. DMB 가입자의 다수가 휴대전화를 이용해서 방송을 즐긴다. 한국인의 가장 친숙한 여가 수단인 TV가 길 위로 옮겨왔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시청료가 없는 지상파 DMB 가입자는 이미 1천만명을 넘어섰다. 위기에 빠져 있는 사업자의 상황과 관계없이 DMB는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다. 사회인 야구를 즐기는 김지윤씨(32)는 “야구 중계가 있을 때는 DMB를 시청하고 중계가 없을 때는 야구 게임을 즐기곤 한다”라고 말했다. DMB 역시 세대와 성별에 따라 선호하는 채널이 다르다. TU 미디어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30대에서 50대까지는 익숙한 지상파 채널을 선호하는 반면 10대, 20대는 기호에 따라 게임, 예능, 드라마, 가요 채널을 다양하게 즐기고 있다. 남성은 게임과 스포츠 채널을, 여성은 드라마와 예능 채널을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수험생이나 직장을 다니며 짬짬이 공부하는 샐러던트(saladent : salaried man과 student의 합성어)에게는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 있는 PMP가 효자다. 특히 시간 맞춰 학원을 다닐 수 없는 처지인 샐러던트에게 시간 장소에 대한 제약 없이 강의를 들을 수 있는 PMP는 인기가 많다. PMP가 재충전의 도구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서미란씨(28)는 “도서관을 오고 가는 길에 동영상 강의를 주로 이용하는데 1분 1초가 아까운 취업 준비생에게 PMP는 고마운 존재다”라고 말했다. ‘미드’ 열풍도 PMP 대중화의 일등 공신이다. 실제로 동영상 강의를 보려고 PMP를 구입했다가 영화, 미드, 저패니메이션 등의 영상오락물에 빠져든 사람도 많다.
사실 PMP, PDA, 휴대용 게임기 등은 젊은 세대 특히 얼리어답터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기기가 구현하는 다양한 기능을 다루기가 복잡하고 기기를 통해 구현되는 콘텐츠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휴대전화를 제외한 대다수 포터블 기기가 꼭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따라서 일반인보다는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을 알차게 사용할 수 있는 얼리어답터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포터블 기기를 이용한 무선 인터넷도 요금 부담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만 이용했다.
하지만 기기의 가격이 저렴해지고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는 제품이 등장하면서 슬로우어답터들이 모바일 기기나 포터블 기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길 위의 오락실’을 즐기는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40~50대의 아저씨 아줌마도 작은 화면을 노려보며 자신만의 놀이에 열중이다. 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책, 잡지, 신문 등 인쇄 매체에 익숙하다. 이들은 뉴미디어에 적응하기보다는 올드미디어에 만족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작은 화면에 깨알 같이 박혀 있는 글씨나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손가락,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이어폰의 높은 성량이 익숙하지 않다는 점도 뉴미디어와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손안의 오락문화에서 이들을 열외 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두뇌 트레이닝’ 효과 내세운 게임들, 기성세대까지 유혹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 세대가 손안의 오락실을 애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용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들을 포터블 유흥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DMB와 닌텐도DS의 힘이 크다. DMB가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의 세계는 기성세대들에게도 익숙한 오락거리다. 즐기기 위해 새롭게 적응해야 할 필요가 없다.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켜고, 끄고, 채널을 전환하고, 볼륨을 조절하는 것 정도. 이 정도라면 아무리 전자기기에 약한 기성세대일지라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어폰과 너무 작은 화면이 걸림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동하면서도 방송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더욱 크다.
닌텐도DS는 기성세대에게 게임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었다. 닌텐도DS의 소프트웨어는 조작이 간단하고 게임 사이의 간격이 짧아서 어른들이 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다양한 기능을 탑재했음에도 실패한 소니의 PSP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닌텐도DS가 슬로우어답터를 위한 것이라면 PSP는 얼리어답터를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닌텐도DS와 PSP의 엇갈린 명암은 슬로우어답터가 ‘길 위의 오락실’ 현상의 중심에 서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살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포터블 기기는 이를 완성하는 좋은 액세서리다. 사람들의 손 위에 올려져 있는 포터블 기기는 다양한 모양과 형형색색의 빛깔을 띠고 있다. 튜닝(Tunning) 때문이다. 튜닝은 기성 완제품에 케이스를 씌우고,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히고, 큐빅으로 제품을 치장하고, 스티커를 입히는 과정을 거쳐 외관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휴대전화가 튜닝의 주요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화려하게 변신한 PMP, 휴대용 게임기 등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튜닝을 통해 다른 사람과 차별된 자기만의 개성이 담긴 포터블 기기를 소유하게 된다. 생산업체에서도 이들의 취향을 고려해서 다양한 색상의 기기를 출시하고 있다.
포터블 기기는 이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우리는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배움을 위해,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길 위의 오락실’을 찾는다. 아직까지 ‘길 위의 오락실’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과감히 도전해보자.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새로운 즐거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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