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연착륙’ 위한 활주로 닦기 계속된다
  • 심정택 (자유기고가) ()
  • 승인 2008.04.2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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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신안으로 삼성 오너 일가 경영권 오히려 강화 / “삼성경제연구소가 전략기획실 역할 대신” 전망도

 
이건희 회장이 떠난 삼성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이재용 전무가 삼성 총수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떤 통과의례를 치러야 하는가. 지난 4월22일 이회장의 입을 통해 발표된 삼성 경영 쇄신안을 접한 재계 안팎의 궁금증은 이렇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삼성은 이제 새로운 시험대에 놓이게 되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그룹 경영을 좌지우지했던 이회장이 지휘선상의 정점에서 사라졌다. 일각에서는 그의 퇴진을 놓고 진실성을 의심하는 얘기도 나온다. 그가 대주주인 만큼 어떤 형태로든 그룹 일에 개입할 소지는 있지만 이전처럼 각 계열사의 경영을 일괄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재계에서는 이런 변화 자체가 삼성 경영 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리라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 각 계열사의 전문경영인들은 이제 독자적인 생존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전의 ‘스피드 경영’에 따라 전략기획실의 총체적인 지휘를 받아 이행만 하면 되었던 시절과는 분명히 다르다. 계열사들은 더 이상 위에서 배분한 재원을 가지고 그 규모에 맞는 경영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회장의 퇴진 선언은 전문경영인들에 의한 그룹 경영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수빈 회장, 사장단 회의 이끌며 ‘과도기’ 지휘

오는 5월 그룹 인사가 단행되면 삼성을 이끌 집단의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일사불란했던 이전의 하향식 지휘 라인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 재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즉 계열사들이 독자적인 경영 계획을 수립해 사장단 협의회에 올려 추인을 받는 식의 그룹 경영이 당분간 지속되리라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느슨한 경영 구조를 이끌 사람은 이건희 회장이 그룹 대표로 지명한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다. 그가 언제까지 삼성의 얼굴 마담 역할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이재용 전무로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기를 메우는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은 크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타계로 이건희 회장이 지난 1987년 그룹 회장직에 취임할 무렵 영남 출신의 신현확 전 총리가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되어 그룹의 좌장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이회장의 고등학교(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로 그룹 주요 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역임하고 삼성공익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한 이수빈 회장 역시 신 전 총리와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실제로 이수빈 회장이 그다지 확고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은 아니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 이는 앞으로 그가 주재하게 될 계열사 사장단 협의회의 성격을 추론하게 한다. 다시 말해 사장단 협의회가 그룹의 경영 목표와 방향 설정, 미래 산업 육성 같은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각 계열사의 현황 등을 청취하고 평가하는 간담회 형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수빈 회장은 그동안 그룹 원로로 활동하면서도 사장단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룹 내 의전상으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보다 앞서 있었지만 실제 경영 활동에서는 비켜나 있었던 셈이다.
 재계 인사들은 이번 삼성의 쇄신안이 그룹을 전자나 금융 등으로 세분하는 구조 혁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종전 그룹 내 핵심 경영인들의 위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윤종용 부회장을 비롯해 경영 일선에서 나름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온 전문경영인들은 그룹 경영을 안정화시키는 차원에서 제 목소리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재용 전무의 거취는 그룹 전략기획실의 해체와 맞물려 주목되고 있다. 그동안 이재용 전무의 계열사 지분 확보나 그의 경영 수업의 기획을 주도한 것은 전략기획실이었다. 이번 쇄신안에 따라 전략기획실을 이끌었던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퇴진이 불가피해 기존 멤버들도 대거 물러날 것이 확실시된다. 
삼성 안팎에서는 전략기획실이 폐지되어 인력이나 조직이 획기적으로 줄겠지만 기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 지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룹 회장직만 내놓은 것이어서 최대 주주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회장을 보필할 비서팀이 새로 구성될 가능성은 있다.

이전무, 편법·불법 승계 논란에서 일단 해방…내부 인맥도 탄탄

 

더구나 이재용 전무에게 그룹 경영권을 넘기는 문제가 삼성에게는 여전히 지상 과제로 남아 있다. 이전무는 그룹측에서 발표한 대로 주주와 임직원, 사회로부터 납득할 만한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야 경영권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전무가 아버지의 퇴진과 함께 그룹 경영 구조가 바뀌었음에도 삼성에버랜드의 1대 주주로 사실상 삼성그룹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삼성측에서 이건희 회장의 차명 지분을 실명으로 전환해 ‘유익한 일’에 쓴다고 밝혔듯이 삼성 오너 일가의 경영권은 이번 경영 쇄신안 발표를 통해 더욱 강화된 면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이재용 체제를 어떻게 연착륙시킬 것인가가 삼성의 최대 고민거리가 된 것이다. 이전무는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됨에 따라 적어도 1~2년 동안은 해외를 전전할 가능성이 커졌다. 삼성이 이미 글로벌 기업으로 입지를 굳혔기 때문에 이전무는 해외 경영에서 얼마든지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결국 이전무의 경영 능력에 대한 검증이 해외에서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금의환향한 그가 자연스럽게 삼성의 대권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현재 유력한 시나리오로 떠돌고 있다.
 이재용 체제 출범과 관련해 그동안 삼성전자나 삼성경제연구소 등에 이전무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가 꾸준히 나왔다. 이들 중 일부는 외부에서 스카우트한 경우가 있고 내부에서 발탁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전략기획실 각 팀장들은 이전무에게 그룹 현안을 보고해왔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는 그가 주재하는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하면 이번 쇄신안이 나오기 전에 이전무 체제가 실질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재용 전무의 인맥은 이번 쇄신안 발표에도 불구하고 흩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삼성 안팎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전무의 앞에 놓인 ‘고난의 행군’ 길은 결과적으로 후계자의 정통성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삼성경제연구소가 앞으로 전략기획실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금도 삼성경제연구소는 그룹의 중장기 전략이나 지배구조 개편 문제, 경영권 승계 구도 등 그룹 현안에 대한 검토와 실천 방안을 연구하며 싱크탱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룹의 신수종 사업이나 전체적인 그룹 자원의 배분, 경쟁력 강화 등 전략기획실에서 맡았던 일들을 개별 계열사 차원에서 다루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삼성경제연구소의 역할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이전무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경영권 편법 승계 논란이었다. 이는 세금 몇 푼을 아끼려다가 대의를 놓친 소탐대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세계그룹이 정당하게 증여세를 물고 대물림을 한 것을 보면 삼성의 경영권 편법 승계 시도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것이었다.
게다가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주도한 e삼성의 경영 실험은 되레 그의 경영 이력에 흠집을 냈고, 이는 삼성생명 상장이나 금산 분리에 따른 지배구조 개편 등의 문제와 얽혀 있다. 
 이전무의 이런 ‘원죄’들은 이건희 회장이 퇴진 선언과 함께 떠맡게 되었다. 이전무가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 날개를 펼칠 여건을 이회장이 만들어준 것이다. 사기업에서 경영권의 공백이 생긴다면 큰 문제다. 이회장은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며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할 공간을 비워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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