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은 뛰는데 언론은 거북이 걸음
  • 한준희 (KBS 해설위원) ()
  • 승인 2008.04.2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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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보도에 왜곡된 내용 등 언론사 실수 많아 ‘코리언 프리미어리거’ 탄생 후 ‘벼락 공부’한 탓

 
유 년기, 청소년기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에서 외국 프로 축구를 감상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중계는 고사하고 편집·축약된 1970~1980년대 분데스리가 방송이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인터컨티넨탈컵(도요타컵), 그리고 잠시 방영되었던(리그였는지 컵이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잉글랜드 축구가 있기는 했다.
시간이 더 흘러 1990년대 중반, KBS 위성방송이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로축구를 보여주기 시작했던 것이 본격적인 해외 프로축구 방송의 출발이었다. 이후 이것은 케이블 채널들을 통해 좀더 확대된다. 설사 생중계가 아닐지라도 스페인·이탈리아·잉글랜드 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의 핵심 경기를 고루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2002 월드컵을 지나면서 방송하는 채널의 수, 방송되는 경기의 수는 조금 더 늘어났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방송사들의 입장에서 해외 축구 리그가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콘텐츠였던 것 같지는 않다. 마니아들의 수는 여전히 제한적이었으며, 일부 리그들의 시청률은 틀림없이 저조했다. 결국 시청률을 끌어오지 못하는 리그는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기가 다시 어려워졌다.
이 모든 상황을 바꿔놓은 사건이 바로 ‘코리언 프리미어리거’의 탄생이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잉글랜드 최상부 리그 무대를 밟으며 케이블 채널에는 이른바 ‘박지성 경기 중계’ ‘이영표 경기 중계’가 생겨났다. 축구에도 비로소 야구의 ‘박찬호가 좋았던 시절’과 같은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보도의 양은 늘었지만 질적인 진전 더뎌

이는 즉각 다방면에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온라인 해외 축구 커뮤니티의 회원 수는 이전까지의 완만한 증가세와는 대조적으로 가파르게 증가했으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해외 축구 전용 섹션을 만들었다. 월드컵을 치르고 나서도 외국 축구 소식 다루기에 별반 관심이 없던 언론들 또한 프리미어리그 웹사이트들을 앞 다투어 뒤져보기 시작했고, 박찬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제 박지성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필자가 확신하건대 2000년대 초반 그것의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스카이스포츠’ 웹사이트는 어느덧 ‘박지성 경기’만 끝나면 모두가 달려가 평점을 확인하는 사이트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유럽 축구를 감상하기가 꽤 좋은 곳이다. 우리 선수들이 많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편중된 중계 현실이 살짝 아쉬움을 던져주기는 하더라도, UEFA 챔피언스리그, 이탈리아 세리에A, 스페인 라리가,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와 잉글랜드의 컵대회들에 이르기까지 1주일 동안 볼 수 있는 유럽 축구 경기가 스무 개에 이를 지경이니 말이다. 격세지감이란 이런 때에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충분한 검증을 마치고 프리미어리그로 옮겨간 주인공들, 박지성과 이영표는 분투와 선전을 거듭했다. 험난한 경쟁의 시절이 도래하기 이전까지 토트넘의 붙박이 왼쪽 수비수로 활약해온 이영표는 소속 팀이 고난의 시절을 딛고 상위권 클럽으로 거듭나는 데 한몫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의 명문으로 이적한 박지성은 초대형 클럽에서의 필연적 경합 속에서도 적지 않은 출장 기회를 부여받으며 팀을 위해 소금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영표가 겪고 있는 현재의 난관, 박지성이 헤쳐나가야만 하는 끊임없는 파도에도 두 선수가 이제껏 이룩한 성과는 그 자체로 칭찬받아 마땅한, 훌륭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박지성·이영표의 활약상은 이 땅의 사람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리가 개최한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4강에 오르기는 했으나, 축구 선진국과는 여전히 거리가 먼 한국의 선수들이 축구의 본고장에서 세계 도처로부터 몰려든 재능들과 더불어 투쟁하는 것은 틀림없는 뿌듯함으로 다가온다. 이는 비단 축구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박찬호든, 박세리든, 김연아든, 박태환이든, 아니면 예술이나 학문 분야의 인물들이든 간에 사실상 분야와 종목을 막론하고 한국인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사례들을 목격하면서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들과는 완전히 별개로,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언론들의 보도 행태에는 적잖이 문제가 있다. 모든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유럽 축구에 대한 언론의 발전 속도는 더디다. 간단히 말해 보도의 ‘양’은 무지막지하게 늘었으되 그 ‘질’이 문제다.
우선, 해외 축구에 대한 심도 있는 배경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유럽 축구를 향유하는 사람의 수는 별로 많지 않았다. 자연스럽게도 옛 시절 신문들에서 유럽 축구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기란 지극히 어려웠고, 그나마 가장 규칙적인 유럽 축구 보도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의 뉴스 화면을 수입한 9시 <스포츠 뉴스>의 골 장면 정도가 전부였다.
199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가 유럽이 흔들릴 정도의 역사적인 트레블(대삼관)을 달성했던 바로 다음 날 데이비드 베컴을 맨유의 ‘간판 공격수(?)’라고 적은 신문들이 존재했던 것도 어쩌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닌데, 월드컵에서 잠깐 보았던 외국 선수의 자세한 사항을 외워둘 필요가 없는 시절이었던 탓이 크다. 결국 박지성·이영표의 프리미어리그 입성을 전후해 ‘벼락 공부’에 돌입했던 각종 언론들은 그 벼락 공부의 필연적 결과로서 우리 선수 기사에 등장하는 관련 내용 및 배경의 기술을 서술하는 데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늦게 시작한 공부라고 해도 가급적이면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둘째, 우리 선수들에 대한 뿌듯함, 자랑스러움이 왜곡된 기사로까지 발전(?)해서는 곤란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리 선수들과 포지션 경합을 벌이는 선수들을 비하하는 유형의 기사. 필자는 해외 축구를 다루는 많은 기사들이 한국 선수 동정에 집중되고 있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슬란드 뉴스가 아이더 구드욘슨 (바르셀로나)을, 이스라엘 신문이 요시 베나윤 (리버풀)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이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로서, 예를 들어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두, 나니, 라이언 긱스 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유럽 현지의 상식 및 안목과 상충되는 기사를 쓰는 것은 한마디로 문제가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나우두를 향해 듣기 민망할 정도로 비하하는 코멘트를 서슴지 않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어렵게 되자 이제는 ‘신참’ 나니와 ‘노장’ 긱스를 비난의 타깃으로 삼는 행위는 오히려 박지성의 분투와 선전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이미 박지성 그 자신이 자신의 특기와 장점으로써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꿋꿋이 살아남고 있기 때문이다. 맨유와 바르셀로나의 ‘세기의 대결’에서조차 박지성은 그 자신이 거대 클럽에 도움이 되는 자원임을 입증했다.

외국 축구에 대해 오해 심어줄 수 있어

또한 ‘프리미어리그가 곧 유럽 축구’라는 식의 보도 행태 역시 개선되어야만 한다. 앞에서도 인정했던 바, 우리 선수들이 많이 뛰고 있는 잉글랜드에 방송 중계와 언론의 초점이 집중되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다른 리그들 및 해외 축구 일반에 대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 보도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야구의 현실과는 달리, 축구에는 잉글랜드 이외에도 빛나는 전통과 실력을 지닌 리그들이 존재하며-지금 잉글랜드가 가장 뻗어 나아가는 리그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그들 각각의 스타일은 분명한 장·단점을 지닌다. 해외 축구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팬들, 그리고 해외 진출을 꿈꾸는 우리의 어린 선수들을 위해서라도 방송과 언론의 균형 감각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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