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파워’ 없는 강대국은 위험하다
  •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8.05.0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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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위 사태는 명분 없는 폭력…중국, ‘책임있는 대국’의 자세로 공존·공영의 국제 관계 추구해야

 

1980년대 중국 사회를 풍미한 것은 개혁개방론이었다. 개혁적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중국 문명을 비판하고 서구 문명을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여론을 주도했다. 이런 흐름은 1990년대 이후 중화 민족주의적 정서가 확산되고 전통적인 부국강병론이 강조되는 경향성으로 바뀌었다. 급속한 경제 성장에 의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전통적 문화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민족 자존을 강조하면서 미국에 대해서도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최근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분출된 중국의 이른바 ‘애국주의’ 정서는 이런 흐름의 정점을 보여준다. 4월27일 서울의 성화 봉송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는 이런 애국주의가 왜곡되어 표출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근대 시기 이래 크게 상처받았다. 특히 일본에게 청일전쟁(중국에서는 갑오전쟁으로 칭한다)에서 참패하고, 1930년대 중일전쟁으로 거의 모든 국토가 일본군에게 유린되었던 경험은 중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깊은 피해자 의식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더 이상 피해국일 수만은 없다. 경제 규모가 독일을 추월해 세계 3위에 도달한 수준이고, 군사 예산이 세계 2위이며 스스로 대국 외교를 주장하는 중국이 여전히 약소국이나 제3 세계로 간주될 수는 없다. 이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강대국의 지위에 성큼 올라선 것이다.

중국 최대 전성기 누린 당나라의 외교 전략을 돌아보라

중국이 강대국 외교를 주장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역량을 지닌 국가로서 당연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실제 행동으로써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강대국 외교 전략은 우선 외교의 심리 상태를 조정해 근대 시기 열강들이 중국에게 강제한 ‘굴욕 외교’의 어두운 그림자와 ‘피해자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중국이 서방이 주도하는 국제 사회에서 형성된 ‘고독’과 ‘분노’의 심리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 강대국의 자신감, 이성 그리고 평상심의 심리 상태를 갖게 하는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 마땅히 져야 할 강대국의 책임을 담당하고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지위를 쟁취해 자신의 역할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전 시기 당나라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각 민족의 다양성을 인정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지위도 오랜 기간에 걸쳐 충분히 누렸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충분한 외교 정책이 축적되어 있다. 그러한 중심 국가로서의 경험을 지금 바로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강대국이란 하드 파워(hard power)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필요하다.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이론은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로지프 나이 교수가 처음 주창했다. 소프트 파워란 군사력이나 경제제재 등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힘인 하드 파워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강제력보다는 자발적 동의에 의해 얻어지는 능력을 말한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세계는 부국 강병을 토대로 하는 하드 파워 즉, 경성(硬性) 국가의 시대로부터 문화를 토대로 한 소프트 파워 즉, 연성(軟性) 국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실제 이전 시기 중국이 그토록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유일한 패권 국가로 군림할 수 있었던 토대는 중국이 지니고 있던 압도적인 문화적 패권이었다. 사실 하드 파워 측면에서 중국은 대단히 취약했다.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시켰던 강력한 진시황도 북방의 흉노족을 너무도 두려워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후에도 중국의 한족은 만주족과 몽골족 등 북방 민족에게 항상 시달려야 했고 번번이 중원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 멸망당해야 했다. 남쪽 방면으로도 일본 왜구에게 계속 침탈을 당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연전연패를 당하며 온갖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끝내 이민족들을 포용하고 흡수해 결국 그들을 동화시켰다.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중국이 가진 압도적인 문화적 역량, 즉 소프트 파워에 기반을 둔 결과였다. 그간 미국이 세계의 유일한 패권 국가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경제력과 군사력의 우위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유,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정립하고 이를 확산하려는 소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중국이 진정한 강대국 그리고 패권국으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중국적 소프트 파워를 지닐 수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주한 중국 대사는 왜 김일성 대학 출신들뿐인가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 장왕은 이웃 진나라에서 대부 하징서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사건이 벌어지자 진나라 토벌에 나서면서 진나라 백성들에게 포고령을 내렸다. “안심하라! 이번 토벌은 오직 하징서를 응징하는 뜻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하지만 장왕은 하징서를 사로잡아 죽인 다음 진나라를 초나라의 현 (縣)으로 복속시켜버렸다. 신하들이 모두 모여 축하했다. 그러나 신숙시라는 신하만은 축하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장왕이 의아하게 생각해 그 까닭을 묻자 신숙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소가 자기 밭을 지나갔다고 그 소를 빼앗은 어느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소가 밭을 밟아 밭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소까지 빼앗는 것은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당초 진나라를 공격하실 때, 대왕께서는 진나라에 반란이 일어나 제후들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셨습니다. 인의(仁義)라는 명분을 가지고 정벌하셨는데 도리어 진나라의 영토를 합병하시고 현까지 설치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는 무엇으로써 다시 천하 제후들을 호령하실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장왕은 진나라 땅을 되돌려주고 암살당했던 왕의 아들을 불러들여 진나라 왕에 즉위하도록 했다. 후대에 공자가 이 기록을 읽다가 크게 감탄했다. “초나라 장왕이야말로 훌륭한 인물이다. 나라 하나를 얻는 것보다 자기의 말 한마디를 더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른바 ‘정명(正名)’을 대단히 중시했다. 어떤 일에든 명분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명분이 바르지 못하게 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면 정사(政事)가 성공할 수 없다”라고 갈파했다.

 


이처럼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은 강대국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이제까지 중국이 적지 않은 나라들로부터 적극적인 혹은 묵시적인 동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고 ‘평화 공존’을 주창해온 중국의 역할 때문이었다. 우리는 티베트 문제가 국내적 문제이며 주권 문제일 뿐이라는 중국의 주장을 동의 여부를 떠나 경청하고 있다. 만약 이번 서울에서의 성화 봉송 과정에서 중국 유학생들이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했다면 한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중국의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할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드러난 바와 같이 남의 나라에서 폭력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행사한 것은 자신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주권을 소중히 하면서도 정작 타국의 주권은 철저하게 부정한 결과로서 전혀 도덕적인 명분을 가질 수 없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전·현직 주한 중국대사들이 모두 북한 김일성 대학에서 유학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다. 중국으로서도 계속 이러한 경험을 지닌 인물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과 북한 등 계속 공산권 국가에서 교육을 받고 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전·현직 대사들이 개방적 민주 사회에 대한 이해 및 국제적 감각을 충분하게 지니기 어려운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정서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남한 사회에 대해 편견을 가질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김일성 대학 출신을 계속 대사로 파견하는 것은 남한 정부에 대한 일종의 결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기치로 내건 ‘창신’ 정신,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티베트는 줄곧 독립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청나라 때 처음으로 티베트 공략에 성공해 대신(大臣) 제도를 두었다. 청나라는 최종적으로 티베트를 자기네 보호령으로 두어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대신이 군사와 외교를 책임지고, 중앙 정부의 책봉을 받은 달라이 라마와 반선(班禪, 판첸)의 티베트 종교 지도자가 공동으로 티베트의 종교 업무를 관할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공 제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고, 특히 우리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조공 제도란 ‘조배(朝拜)와 진공(進貢)’의 약칭으로서 양국 혹은 두 개 정부 간에 일종의 존비(尊卑) 지위를 인정하는 예절적(禮節的) 관계를 지칭한다. 즉, 조공이라는 방식에 의해 약소국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강대국의 승인을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공 제도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면서 모색되고 실행된 국제 관계의 절묘한 타협적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군사적 점령이나 정복이 아니라 강대국은 명분을 얻고 약소국은 실리를 얻은 타협적 공존 관계였던 것이다. 이 조공 제도는 원래 기복(畿服) 제도에서 출발해 책봉 제도와 기미 제도라는 여러 형태를 거쳐 확립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난 뒤 명 태조 주원장은 명확하게 안남, 고려, 유구 제국 등의 국가를 ‘정복하지 않은 국가’로 규정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중국의 실제 통제 범위를 확립했다. 또한 그는 ‘후왕부래(厚往薄來·후하게 주고 적게 받는)’ 조공 제도를 정립함으로써 조공 체제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서 운용되는 국제 관계 체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 관계 체제에서 중국 중원 정권은 일원적(一元的) 중심으로 되었고, 각 조공국은 이러한 중국의 중심 지위를 인정하면서 중앙 정권의 외번(外蕃)을 구성했다.


실용주의와 타협 정신은 중국의 중요한 장점이다. 이번 티베트 사태를 계기로 중국 정부가 좀더 창조적이면서도 이러한 중국적 전통에 충실한 민족 간의 공존 방안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지나친 통합 및 융합 정책을 지양해야 한다. 지금 티베트인들에게 가장 커다란 불만은 자신들의 역사와 정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이는 우리 한국인들이 동북공정을 반대하는 이유가 중국측이 오늘의 필요에 의해 과거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빼앗아가려고 하기 때문인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최근 들어 중국 정부는 부쩍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창조해나간다’는 ‘창신(創新)’과 ‘조화’를 기치로 내걸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진실로 중국 정부가 다양한 공존과 조화를 실현시키는 방식을 ‘창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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