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만 가면 ‘와 이리 좋노!’
  • 반도헌 기자 bani001@sisapress.com ()
  • 승인 2008.05.02 13: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산 프로야구의 사회학 /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는 거대한 놀이터…먹고 춤추고 노래하고

 
20 08 시즌 초반 롯데 자이언츠가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최초의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 ‘제1호’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지휘 아래 환골탈태한 롯데 자이언츠의 초반 모습이 심상치 않다는 평가다. 매년 초반에 잘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죽을 쒔던 모습과는 어딘지 다르다는 것이다. 롯데 팬들은 올해야말로 ‘가을에도 야구하고’, 내친걸음에 우승까지 달려갈 좋은 기회라며 들떠 있다.
롯데 선수들이 앞서서 달려나가니까 부산 갈매기들은 날아다닌다. 홈, 원정 할 것 없이 롯데 경기가 열리는 구장은 부산 갈매기들로 득시글하다. 부산 갈매기가 날자 KBO도 신이 났다. 이미 최단 게임 100만 관중을 넘어섰고 5백만 관중 동원도 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무엇이 이처럼 부산 갈매기들을 특별하게 만든 것일까. 부산 갈매기들은 TV 중계를 보는 것보다 야구장을 직접 찾는 것을 선호한다. 부산 시민 중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직 야구장에 안 가본 사람이 드물 정도다. 부산의 택시기사 이학수씨(56)는 야구장을 가본 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부산 사람 중에 야구장 안 가본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예전에 경기장 시설이 좋지 않을 때는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이 단체로 근처 목욕탕을 찾고는 했다며 그때 강병철 감독, 김민호 선수 등과 같이 때를 밀었던 ‘무용담’을 자랑했다. 부산 사람들이 롯데 자이언츠와 선수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시민들과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부산 시민 중 사직야구장 안 가본 사람 거의 없을 정도

부산 갈매기들이 사직구장을 많이 찾는 이유로 응원 문화를 꼽을 수 있다. 부산의 응원은 신문지 응원과 쓰레기봉투 응원으로 대표된다. 부산 갈매기들은 야구장에서 쉴 새 없이 신문지 꽃술을 흔들고 소리를 외친다. 심지어 집에서 TV 중계를 볼 때도 유니폼을 입고 신문지를 찢어 응원 도구를 만들고 운동장에 가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응원곡 <부산 갈매기>를 부르고 부산 냄새가 물씬 나는 사투리 구호와 응원가를 외치는 모습에서 뿜어져나오는 위압감은,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그만큼 야구가 있는 날의 사직구장 응원 열기는 하늘을 찌른다. 흥겨운 응원 문화는 젊은 팬들을 불러모았다. 사직구장을 찾은 젊은 부산 갈매기들은 2002년 월드컵 때 벌어진 전국민적 카니벌의 흥분을 야구 시즌이면 언제든지 만끽하고 있다. 사직에서 만난 이 아무개씨(23)는 가위로 신문지를 오려 정성껏 응원 도구를 만들고 있었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그녀는 “롯데 팬도 아니고 야구도 잘 모르지만 미칠 듯한 분위기가 좋아 경기장을 자주 찾는다”라고 말했다.
사직구장은 부산 사람들에게 야구 외에도 다양한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젊은 남녀에게 사직은 무도회장이다. 야구장이라고 해서 유니폼이나 편한 추리닝만을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사직에는 다양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많다. 이들이 흘러나오는 응원가에 맞춰 흥겹게 몸을 흔드는 모습은 여느 클럽을 방불케 한다. 가족들에게 사직은 공원이다. 주말 오후 경기에는 가족 나들이 삼아 경기장을 찾는 가족 단위 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남편과 자녀, 시아버지, 조카들과 경기장을 찾은 30대의 한 임신부는 “예전처럼 거친 응원 문화가 많이 줄어 아이들과 같이 오기가 더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사직구장 자체가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자골목이다. 통닭과 맥주로 시작해서 탕수육, 만두, 오뎅, 오징어 등 없는 것이 없다. 관중석 뒤편 통로에 늘어서 있는 음식 좌판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식당가다. 대학생들에게 사직구장은 쉽게 갈 수 있는 MT 장소이기도 하다. MT를 가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이들의 손에는 맥주와 먹을거리가 잔뜩 쥐어져 있다.
부산의 야구 열기를 응원 문화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요즘은 젊은 갈매기들이 사직을 점령하다시피 하지만 예전에는 아저씨 팬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경기 후반부가 되면 육두문자가 남발하고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직에 아저씨 야구팬들이 많았던 이유로 부산에 자영업자가 많고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장기간 휴식이 주어지는 마도로스가 많다는 지역적 특성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일부분만을 설명할 뿐이다. 부산이 구도(球都)로 불린 것은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 아마 야구 시절부터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롯데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구덕 시절부터 롯데 경기를 보아왔다는 한 50대 야구팬은 “부산·경남이 야구의 원조”라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미스터빅스 좌석은 아저씨 팬들의 귀환 장소다. 중앙 지정석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 50석은 미스터빅스 회원들의 개인전용좌석이다. 사직 홈경기(57경기) 시즌권을 산 이들은 언제든지 명당에 마련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다.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아저씨 팬이다. 부부가 같이 오는 경우도 많다. 항상 경기장에서 마주쳐서인지 가족처럼 서로를 잘 안다. 관중석의 다른 곳처럼 응원에 열심이지는 않지만 모두가 야구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전문가다 보니 쉴 새 없이 토론이 벌어진다. 미스터빅스 회원인 김성진씨(49)는 “올해는 반드시 4강 안에 들 것이다. 지난 주말 17 대 3으로 진 경기를 끝까지 지켜봤는데 무너진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선수들을 보니 롯데 특유의 근성이 보이더라”라고 나름의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롯데 특유의 근성으로 올해에는 4강 갈 것” 전망도

부산 사람들은 야구 사랑을 모태 신앙에서 찾는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야구 얘기, 롯데 자이언츠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롯데 팬이 된다는 것이다. 부산의 야구팬은 부모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롯데 사랑을 각인시킨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자녀들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망이다. 부산의 젊은 아버지들은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힌 자녀를 데리고 사직구장을 찾는 일이 젊은 날의 ‘로망’ 중 하나다. 그래서 사직구장에는 야구를 보러 온 어린 아이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많다. 손민한·이대호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은 열한 살, 여덟 살 두 아들과 경기장을 찾은 전성진씨(39)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야구장에 같이 다녀서인지 경기장 오는 것을 좋아한다. 방학 때면 같이 원정 경기를 보러 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관중석으로 넘어온 볼을 아이들에게 건네주는 ‘아 주라’ 문화가 생긴 것도 주변에 공을 찾아다니는 아이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박찬호 선수가 LA 다저스에서 활약하던 시기에 동료였던 숀 그린 선수는 잡은 공을 펜스 가까이 있는 아이에게 건네주곤 했다. 이를 보고 해설자는 “아이들에게 야구 사랑을 전파하는 전도사”라고 평가하고는 했다. 그러고 보면 ‘아 주는’ 부산 야구팬들은 롯데 자이언츠 사랑을 전파하는 전도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열혈 부산 팬의 심리는 벌써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다. 노른자위는 사직구장 내에 마련된 자이언츠 숍이다. 자이언츠 숍에는 다른 곳보다 아동용품이 많다. 매장 내 판매 물품 중에 아동용 상품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거의 반에 가깝다. 롯데 자이언츠 홍보팀의 김건태씨는 “지난해부터 아동용품 매장을 확장했다. 이 정도의 아동용품 코너를 마련한 것은 8개 구단 가운데 롯데 자이언츠가 유일하다”라고 말했다. 자이언츠 숍 매장 직원은 “매장을 방문하는 사람 중에서 부모들의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이, 많을 때는 절반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이들 중에서는 이미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유니폼 하나로는 부족해 여러 버전의 유니폼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덟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자이언츠 숍을 찾은 정 아무개씨(38)는 “아들이 유니폼을 갖고 싶어해서 사주려고 왔다. 아빠가 롯데를 좋아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아들도 따라서 좋아하게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이 좋으면 부산시 교육청이 두려움에 떤다는 말이 있다. 야구 성적이 좋은 해에는 부산 지역 고등학교의 명문대 진학률이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이 공부를 빼먹고 사직으로 몰려든다는 것이다. 부산의 야구 사랑은 무서운 교육 열풍을 잠재울 만큼 강한 모양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