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기고 쫓기고 고단한 외주 제작사
  • 반도헌 기자 bani001@sisapress.com ()
  • 승인 2008.05.0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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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저작권 문제로 지상파 방송사와 갈등 고조

ⓒ연합뉴스
한 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방송 프로그램 장르라는 드라마는 여전히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외주제작사와 지상파 방송사 간의 보이지 않는 다툼이 존재한다. 드라마의 한 편당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한정된 예산을 운용해야 하는 방송사와 위험 부담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외주제작사 간에 제작비와 드라마 저작권을 두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외주제작사 김종학프로덕션의 김종학 대표가 지난 4월30일 “방송사가 사회주의 체제”라고 말한 것은 외주제작사와 지상파 방송사 간에 생긴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 발언은 유인촌 문화체육부관광부장관이 외주제작사 대표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자리에는 김대표 외에 이진석 제이에스픽처스 대표, 김기범 초록뱀미디어 대표 등 제작사 대표와 드라마제작사협회 김승수 사무총장, 방송영상산업진흥원 최영호 부원장 등이 참석했다. 김대표는 즉각 자신의 발언을 거두어들이고 사과를 했지만 이미 내놓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방송 3사에 대해 공정위 조사 중

외주제작사와 지상파 방송사 간의 입장 차이가 표면화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월13일 드라마제작사협회 소속 25개 드라마 제작사는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 3사를 공정거래법 위반 등을 이유로 공정위에 신고했다. 드라마제작사협회는 “드라마 저작권은 제작 과정에서 창작 기여도, 투자 비율, 계약 조건 등을 고려해서 정하는 것이 일반 원칙이다. 지상파 방송 3사의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으로 인해 저작권의 일반 원칙이 왜곡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공정위에 신고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지난 4월부터 이 문제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PD저널>은 외주제작사 대표와 간담회를 가졌던 문화부가 ‘드라마 제작 및 유통 활성화 TF’를 구성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문화부가 구성할 TF에는 저작권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드라마제작사협회, 한국방송협회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외주 제작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제작사와 지상파 방송사가 공히 인정하는 부분이다.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상대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창구가 빈약하기 때문에 외주제작사들은 적자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상황이다. 지상파 방송사는 드라마 한 편당 9천만원에서 1억원의 제작비를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금액으로는 현실적으로 드라마 제작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한 관계자는 “지상파 방송사의 사정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제작사의 요구에 맞춰 제작비를 올리기도 힘든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김종학 프로덕션이 <다모> <패션 70’s>의 이재규 감독을 기용해 제작하고 있는 <베토벤 바이러스>는 대작이 아님에도 한 편당 1억3천만원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초록뱀미디어가 제작하고 있는 송승헌의 드라마 복귀작 <에덴의 동쪽>은 무려 3억5천만원에 달한다. 제작비에서 배우들 출연료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배용준, 송승헌, 이영애, 권상우 등 이른바 한류 스타의 회당 출연료는 이미 5천만원을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제작비에서 배우 출연료가 3분의 2 정도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제작비 상승 요인을 배우들에게만 돌리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김종학프로덕션의 박창식 상무이사는 “배우 몸값이 많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 작가, 감독, 스태프 등 모든 인건비가 오른 상황이다. 인건비 외에 부대 비용 증가도 만만치 않다”라고 말했다.

제작비 상승은 바로 외주제작사의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은 국내 굴지의 외주제작사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태왕사신기>로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낸 김종학프로덕션은 94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김종학프로덕션이 만든 또 하나의 성공작 <이산>은 15억원의 손해를 16부 연장 방송으로 줄일 수 있었다. 부족한 제작비를 PPL로 채우던 외주제작사에게 광고 시장의 침체는 경영 악화를 가속시켰다. PPL은 방송의 공영성 등을 이유로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지만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PPL을 합법화하고 활성화시키면서도 공영성을 담보할 만한 대안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외주제작사가 지상파 방송사를 공정위에 제소하면서까지 저작권 문제를 공론화시킨 것은 경영 상황이 그만큼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은 해외 수출을 바라보고 있는 제작사 입장에서 포기하기 힘든 문제다. 그동안 외주제작사와 지상파 방송사 간의 관계에서 방영권을 쥐고 있는 방송사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외주제작사와 방송사가 5 대 5로 저작권을 나누어 갖는 것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다. 박창식 상무이사는 “5 대 5라고 하더라도 지상파 방송사의 자회사가 가져가는 대행 수수료 20%를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4 대 6이 된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방송사로부터 제작비를 적게 받는 대신 저작권을 외주제작사가 가져가는 모델도 있다. 배용준을 앞세운 <태왕사신기>와 권상우의 <못된 사랑>, 사전 제작되고 있는 <식객> 등이 그렇다. <태왕사신기>는 일본에서 방영되면서 다각적인 수익 사업을 펼쳐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SBS제공

정부가 외주 제작 도입 강제한 것도 갈등 원인

외주제작사의 요구와 공정위 제소에 대해 지상파 방송사를 대표하는 한국방송협회는 일단 대응을 자제하고 공정위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한국방송협회 기획사업팀의 손계성 팀장은 “공정위에서 문제가 있다고 결정을 내리면 바로 조정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따져 물을 것이다. 제작비 상승과 경영 부실에 대한 책임을 방송사에게만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

외주제작사와 지상파 방송사 간에 갈등이 생긴 근본 원인을 외주 제작 도입 과정에서 찾는 목소리도 많다. 영상 산업 발전을 위해 도입된 외주 제작제는 지상파 방송사 프로그램의 일정 부분에 대한 외주제작을 의무화하고 있다. 손계성 팀장은 “방송의 공영성을 지키기 위해 교양·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의 자체 제작 비중을 높였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으로 외주 제작 비율을 채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상 산업 발전을 위해 도입된 제도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박창식 상무이사는 “외주 제작 문제가 표면화된 만큼 제작사와 방송사가 머리를 맞대 새로운 판을 짜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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