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이 넘었어도 춤사위가 어디 가나’ 어디 한 번 놀아보세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 승인 2008.05.09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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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서울페스티벌 <천년만세>에 전통예술 명인들 총출동

ⓒ시사저널 박은숙
날 이 맑고 바람이 심하던 지난 5월6일 오후, 창덕궁 내 숙장문 앞 가설 무대.

날아갈듯 마르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하얀 비단옷을 차려입고 무대 위에서 시나위 반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대가 열린 지 한 3분이나 흘렀을까. 무대 뒤편에서 귀에 익은 구음이 흘러나왔다. 중요무형문화재 23호인 안숙선 명창(60)이 즉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예정에 없던 추임새를 넣었던 것이다.

무대 위의 춤꾼은 조갑녀씨(86). 환갑인 안씨는 선배보다는 후배가 훨씬 더 많을 나이이지만 대선배가 무대에 나서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것 같다. 조씨는 이날 10여 분이 넘는 공연을 펼쳤다. 지난해 10월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다시 나와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던 조씨는 그때보다 훨씬 더 길게 춤을 추었다. 조씨는 그날 출연자 중 최고령이었다. 애초 무대에 서기로 했던 동래 한량춤의 문장원옹(90)이 몸이 아파 무대에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침 문안 인사조차 힘겨워할 나이의 문씨에게는 지난 가을 춤판이 사실상 마지막 무대였던 셈이다. 그러기에 조씨가 심한 바람에도 한 발 한 발 움직이며 허공에 춤사위를 그려내자 함께 출연한 국악계 후배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날 무대에는 하이서울페스티벌 프로그램의 하나인 <천년만세>가 펼쳐졌다. 하이서울페스티벌의 예술 총감독으로 위촉된 현대무용가 안은미씨는 전통예술 분야의 예술 부감독으로 연출가 진옥섭씨를 영입해 이번 무대를 꾸몄다. 10년 넘게 전국의 한국 전통 무용가들을 발굴해 무대에 세워온 진씨는 <천년만세>에 그동안 무대에 섰던 올스타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핑크빛 ‘궁(宮)’ 광고판으로 축제의 시작을 알렸던 하이서울페스티벌이 5월11일 끝났다. 사대문 안인 서울광장과 청계천의 출발점인 소라광장, 경복궁 등 서울 시내 5대 궁에서 벌어진 하이서울페스티벌은 서울의 고궁이 소재이자 주제였다. 사대문 안의 경복궁·덕수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 등 5대 궁을 무대로 잔치판을 차린 것이다. 각각의 개별 프로그램이 모두 5대 궁을 거점으로 펼쳐져 초여름 고궁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지난 5월5일과 6일, 이틀간 벌어진 <천년만세>는 지난해와 달라진 하이서울페스티발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 프로그램이었다. 그룹 관람만 허용하며 관람객의 이동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창덕궁의 경우 무대 자체가 색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민살풀이를 추는 군산의 장금도씨, 남원의 조갑녀씨, 채상소고춤의 김운태씨가 고궁 무대의 이색적인 분위기를 한껏 돋우웠고, 명창 안숙선씨와 박송희씨, 승무 무형문화재인 진유림씨, 대학 국악과 교수 중심의 서울악회, 올스타 밴드의 시나위 합주단 등 국악 각 분야의 올스타들이 무대를 채웠다.


5대 궁을 거점으로 초여름 정취 만끽

무대를 연출한 진옥섭씨는 창덕궁 내에 세워진 <천년만세> 무대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예전에 음악을 하던 이에게 궁중광대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궁중에서 벌어지는 연희판에 선다는 것은 예인들에게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이번 무대에 서는 예인들도 각별한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번 무대에 선 명인들은 당연히 그런 영예를 누릴 만한 분들”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뒤 예인들은 창덕궁 내 왕의 집무실 격인 인정전 앞에 나란히 서서 기념 촬영을 했다.

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객석을 채운 시민과 외국인들은 승무와 민살풀이춤, 채상소고춤 등에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이들은 공연이 끝나자 출연자들에게 밀려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정도의 공연이면 예술의전당 등 대형 공연장에서 감상하는 것에 못지않다는 평도 나왔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페스티벌의 무료 공연이 출연자의 지명도가 떨어지고 내용의 밀도도 떨어지는 데 반해 이번 하이서울페스티벌의 고궁 무대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이서울페스티벌 기간 중 경희궁에서는 뮤지컬 <명성황후>가, 덕수궁에서는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의 연주가 열렸다. 무명의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판을 벌이는 프린지 페스티벌도 청계광장이나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등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런 프로그램 중 하이서울페스티벌과 연계해서 열리는 서울스프링실내악 축제와 <명성황후>만 유료 공연이었다.

무용평론가 심정민씨는 이번 하이서울페스티벌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즐기려면 서울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역발상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뭔가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라고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녀는 “총감독인 안은미씨가 프로그램에서 고정관념을 버리고 대중의 감각을 끌어당기려는 시도를 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를 높이려고 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실제 서울광장이나 소라광장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에는 참여형 퍼레이드나 춤 공연 등이 많았다.

하지만 하이서울페스티벌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료 공연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진옥섭씨는 “개인적으로 공연은 유료라는 원칙을 갖고 있다. 대중이 즐겁게 볼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스스로 지갑을 열고 오게끔 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관객에게 강요하는 감동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재미를 주어야 제 발로 공연장에 오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그도 전통 공연이 열리는 공연장의 객석이 허전한 이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는 “인간문화재 등 전통의 원형 보존에 주력하는 창작자의 개인 역량보다는 전통적인 연희 방식을 따르는 무대를 꾸미되 오늘날의 관객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창작품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라고 제안했다. 탈춤이나 시나위 등 전통의 민속춤이나 민속 음악을 무대에 올리되 새로운 이야기로 꾸며진 창작으로 구성해 관객의 귀와 눈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오는 가을 시댄스 축제에서 실현해보겠다고 했다.

어쨌든 창덕궁의 <천년만세>나 창경궁의 <궁궐의 일상-궁중광대와 놀다>, 경복궁의 <세종, 용상에 오르다>, 덕수궁의 국악 퓨전 공연 등은 대중의 일상에서 멀어진 정악, 민속악, 새로운 퓨전 국악 공연 등의 전통예술을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국악계는 단발성의 페스티벌로 전통예술의 자생력을 키우기는 어렵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전통의 ‘보존’과 ‘전승’에만 주력하던 국악인들의 고민은 퓨전 연주와 옥외 공연, 서양식 극장 공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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