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건의’ 묵살…총리보다 실장이 높아?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 승인 2008.05.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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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실에서 전한 문서 대통령실에서 흐지부지…국정 컨트롤타워가 흔들린다

ⓒ연합뉴스
한·미 쇠고기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4월 중순, 국무총리실에서 대통령실로 문서 하나를 급히 전달했다. 문서 내용의 골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해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한승수 국무총리가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한 전 총리를 협상 전략을 짜는 데 십분 활용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한 전 총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개방론자로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FTA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난항을 겪다 끝내 무산된 바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의 전 과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통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문서가 전달될 당시 한 전 총리는 미국 워싱턴에 머무르고 있었다. 고촉통 싱가포르 전 총리와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 등 세계 21개국 전·현직 총리나 재무장관들이 참여하고 있는 ‘와이즈맨 클럽’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총리의 긴급 제안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류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총리의 제안 문서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총리실에서는 “류실장이 한총리의 제안을 묵살했다”라는 불만이 새어나왔다. 한총리 역시 심기가 불편했을 법한데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총리실과 대통령실 안팎에서는 한승수 총리와 류우익 실장이 미묘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류우익 실장의 전횡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라고 비난했다.

한총리의 제안 문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도 않아

한총리와 류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하기 전에는 이렇다 할 만한 연결 고리가 없었다. 한총리는 이대통령과 지연(강원 춘천)이나 학연(연세대) 등 개인적으로도 별다른 인연이 없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한총리는 상공부장관, 주미 대사, 외교부장관, 유엔총회 의장 등 경제와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지난 1월 한승수 유엔기후변화특사가 국무총리 하마평에 오르내릴 때는 총리로 부적합하다는 결격 사유들이 쏟아졌다. 전두환 신군부의 국보위에 참여했고, 지난 1997년 부총리에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외환위기가 터져 책임 논란에 휩싸인 데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외교부장관을 역임했던 이력들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당선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당선인은 한승수 유엔기후변화특사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국제적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가 지향하는 경제를 살리고 통상과 자원 외교를 할 수 있는 가장 적격자”라며 옹호했다. 이대통령의 실용주의 용인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애당초 박근혜 전 대표를 총리로 기용하려다 여의치 않자 박 전 대표의 이종사촌 형부인 한승수 카드로 선회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에 비해 이대통령과 류실장의 관계는 상당히 돈독한 편이다. 류실장은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출신으로 이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부터 싱크탱크였던 국제전략연구원(GSI)을 이끌며 자문 역할을 해왔다. 대통령실장이 된 후에는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고위직 인선 작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부동산 투기 의혹 등으로 장관 내정자들과 수석비서관 등이 줄줄이 낙마하면서 인사 파동에 대한 책임론이 강하게 불거지기도 했다.

여권의 한 인사는 “현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총리와 류실장 사이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스킨십이 부족했다. 여기에 정부와 대통령실의 조직이 개편되고 역할이 바뀌면서 혼돈 상태에 있다. 그러다 보니 총리실과 대통령실이 업무 진행 과정에서 종종 갈등을 겪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총리실과 대통령실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이 국정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제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물가마저 급상승하고 있다. 한·미 쇠고기 협상 문제로 거리의 정치가 다시 시작되었고,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심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까지 곤두박질쳤다. 여권에서 “대선과 총선만 이겼지, 앞날은 긴 터널처럼 보인다”라는 푸념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총체적인 국정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류실장, 수석들에 “대통령 그림자 돼라” 주문

ⓒ시사저널 박은숙

그럼에도 대통령실이나 총리실은 이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이다. “현 정부에서는 대통령만 일하고, 대통령실이나 총리실, 부처들은 보완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라는 비아냥거림이 곳곳에서 나온다. 류실장은 엇박자를 내고 있는 당·청 관계를 조율하려는 의지가 적어 보인다. 이는 류실장이 지난 3월 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한 첫 직원 조례에서 “대통령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문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실장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한총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까지 총리가 갖고 있던 국정 ‘조정자’ 역할을 청와대로 넘긴 상태다. 자원 외교나 글로벌 코리아 비전을 제시하는 등 국정 ‘조력자’ 역할에 주력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는 “당과 청와대, 당과 부처 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실에게 맡길 것이다”라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이해찬 총리는 ‘책임 총리’로 불리면서 국정의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하고 조정하는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다. 부처 간에 엇박자가 나지 않도록 조율 작업까지 책임지면서 이끌어갔다. 이에 비하면 한총리의 위상은 정책 조력자로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총리실 안팎에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한총리는 지난 5월8일에는 직접 나서서 미국 쇠고기 협상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고,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총리실의 부처에 대한 지휘 감독 역할을 강화하겠다”라며 ‘강한 총리실’로 탈바꿈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청와대도 긴급 현안에 대해 총리와 관계 장관 회의체를 즉각 구성해 대책을 마련하도록 총리에게 힘을 실어줄 방침이다.

앞으로 국정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가동될 수 있을지, 그래서 국정 난맥상이 하나씩 풀려나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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