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농사 짓고 보니 쭉정이만 남았네
  • 파리·최정민 통신원 ()
  • 승인 2008.05.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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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1주년 맞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약속한 공약들 대부분 안 지켜져…모든 것 바꾸겠다면서 ‘우물쭈물’

ⓒEPA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지난 주 집권 1주년을 맞았다. 쏟아진 분석들은 대체로 비판적이다. 그는 지난 대선 당시 첫 번째 공약으로 소비자 구매력을 향상시키고 물가를 안정시키겠다고 강조했으나 물가는 날개를 단 채 뛰고 있다.

약속대로 상속세는 줄였다. 하지만 세금 인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부 조직을 축소하겠다던 공약도 흐지부지되어 15명의 장관에 22명의 자문역이 남아 있다. 그나마 빛을 본 것은 활발한 세일즈 외교였다. 그러나 이 또한 인권 문제를 눈감아준 채 성사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뒷말이 무성하다.

이민자 문제 역시 별다른 진척이 없다. 선택적 이민제는 시작도 못하고 있으며 교외 지역 문제는 손도 못 대고 있다. 학군제 실시나 대학 개혁은 계획 발표와 함께 시동을 걸었으나 교사 축소 방침에 고등학생들이 반발하고 나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발목을 잡았던 법안 축소는 성사시켰다. 그러나 뜬금없이 북아프리카를 상대로 지중해 연합 구성을 제안해 독일 등 기타 유럽 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스스로를 과거와의 단절자라고 지칭하며 이전의 정책들과 결별을 선언하며 발표했던 각종 개혁안들 또한 별다른 성과가 없다.

그나마 빛 본 것은 세일즈 외교

지난 5월10일 프랑스 인권연맹 총재인 쟝 피에르 뒤부아는 노예제 폐지 기념일 자리에서 ‘사르코지의 지난 1년이 과연 모두 그의 잘못인가?’라는 물음에 “사르코지 한 사람의 잘못으로만 볼 수는 없다. 대안이 없는 좌파나 입법·사법·행정부 모두가 함께 책임이 있다. 사르코지 스스로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그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따지고 보면 물가 문제나 경제 상황을 사르코지 1인의 잘못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심한 측면이 있다. 지난 5월6일 파리 시내의 살 가보 극장에서는 집권 여당 당원들과 내각 인사들이 모여 사르코지 취임 1주년 기념 행사를 가졌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사르코지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고 내각 수반인 프랑수아 피용 총리의 축하 인사만이 냉랭하게 울려퍼졌다. 엘리제궁의 축하연 또한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채 조용히 치러졌다.

사르코지가 숨을 죽이고 있다. 지난해 뜨거운 열기 속에 대권을 거머쥔 그의 당찬 모습을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지율은 반 토막 났으며 국민 대부분이 그의 재선 출마를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1년을 결산하는 언론의 평가는 거의가 비판적이다. 1주년이 되기 전 있었던 텔레비전 대담에서 사르코지는 자신의 국정 운영이 모두 잘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시인한 바 있다.

이처럼 사르코지가 몰매를 맞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대선에서 집권 여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거침없는 독설을 뽐냈던 나딘 모라노 전 대변인은 최근 프랑스 방송 프랑스 2에 출연해 “이제 1년이 지났다. 고작 1년이다. 그런데 이미 모든 언론이 6개월 전부터 결과가 없다고 비난하고 있다. 현재 개혁은 진행 중이다”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프랑스 2의 저널리스트인 에릴 제무르는 “개혁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사르코지가 약속한 것들은 지켜지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사르코지는 폐쇄 위기에 처한 공장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다시 돌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의 높은 유로화로는 불가능하다. 독일은 절대 유로화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약속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당신들도 잘 알지 않는가?”라고 쏘아붙였다. 불가능한 일들에 희망만 부풀려놓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사르코지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나는 결코 여러분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들을 쏟아냈다. 라디오 프랑스의 정치 칼럼니스트인 드니 봉바는 사르코지 1주년 특집에서 사르코지의 추락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국민이 느끼는 것은 일종의 배신감이다. 약속을 하고 확신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한 것이 없다.”

실상 사르코지가 풀어야 할 첫 단추인 경제난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교적 나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스페인 또한 똑같은 유가 상승과 고유가로 고심하고 있다. 좌파 내각이 집권 2기에 성공했지만 1순위 해결 과제가 경제라고 이미 천명했다. 최근 2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이탈리아는 더 심각하다. 국영 항공사인 알 이탈리아는 외국 기업에 넘겨질 상황이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국영 항공사의 국외 매각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구매자로 지목되었던 에어 프랑스와 네덜란드 항공이 망설이고 있는 지경이며, 나폴리 시는 지방 자치정부의 관리 부실로 쓰레기 대란에 처해 있다. 나폴리 지역 경제의 기반인 관광 사업은 70% 이상 추락했으며 쓰레기 소각으로 인해 지방특산물인 모짜렐라 치즈에 다이옥신이 검출되어 수출 위기까지 불렀다.

좌파 사회당 “시라크와 다를 바가 없다”

“정말 궁금하다. 이대로 사르코지가 유순해진다면 결국 그도 시라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고, 또 그 스타일대로 나가자면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사르코지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참 궁금하다.” 좌파 사회당 대변인인 줄리앙 드레의 말이다. 불도저처럼 모든 것을 갈아엎겠다던 사르코지가 반격의 첫 번째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언론이다. 참다 참다 화가 난 것일까. 급기야 언론을 성토하고 나선 것이다. 최근 1주년을 두고
‘제기랄 4년이나 남았어’라는 제목을 타이틀로 뽑은 바 있는 마리안을 비롯해 비판 일색인 일간 신문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나섰다. 그중에는 물론 문제의 막말 동영상을 보도했던 르 파리지앵도 포함되었다.

사르코지의 언론 담당관인 캬트린 페갸는 최근 카날 플뤼스에 직접 출연해 엘리제를 출입하는 기자들이 대통령을 너무 희극화시킨다고 지적하며 포문을 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대선 때 사르코지는 언론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고 비판을 받았었다. 당시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세세한 분석에 따르면 그는 거의 모든 언론 재벌과 손이 닿아 있었다. 결국 사르코지는 언론을 잘 활용했고 당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언론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지금의 추락이 이미지 관리의 실패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사르코지의 국정 기자회견은 예년과는 달리 생중계되었다. 주요 장면을 편집해 저녁 뉴스 시간에 보도된 것이 아니라 실시간 생방송으로 전국민에게 여과 없이 중계된 것이다. 아마도 ‘말’에는 자신이 있는 대통령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기자회견을 분석하던 한 기자는 “아마도 국민은 우리가 지금 뽑아주고, 정리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대로 프랑스 국민은 대통령의 화려한 답변에 반 토막 난 지지율로 응답한 셈이다. 집권 1년, 사르코지는 매운맛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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