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무게중심, 박근혜에게 쏠리나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8.06.0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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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바꾸는 권력 지도/영남권 등에서 박 전 대표 ‘역할론’ 대두…‘계파 수장’ 이미지 벗고 여권 내 중심으로 ‘부활’할 듯

▲ 6월2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친박연대·친박무소속연대 소속 의원 등 당외 인사들과 만나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수도권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한나라당이 수도권에서 전패했다. 한나라당은 23%의 투표율을 기록한 지난 6·4 재·보선에서 서울 강동구, 인천 서구, 경기 포천에서 모두 졌다. 수도권 민심이 한나라당으로부터 떠났음을 보여주는 징표이자 조직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다. 집권 3개월 만에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17.1%(6월3일 YTN 보도)까지 떨어졌다. 정상적으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험 수위다. 이대통령을 떠받쳤던 수도권과 30~40대, 주부 계층이 쇠고기 정국과 그 이후 조성된 촛불 집회를 계기로 떠나면서 이대통령은 정치적 폐허 위에 서 있다.

“국회에서 논의하자”라고 설득하고 있지만 야당으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먼저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하겠다고 약속하라”라는 것이다. 야당들은 어깨를 걸고 여의도 대신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야당 또한 서 있는 자리가 든든하지만은 않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은 재·보선에서 승리했지만 거리의 민심은 “너희들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고 있다. 국민은 자신들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권을 외면하고 직접 청와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정당이 무력화하면서 지난 대선 때부터 나타났던 정당 정치의 실종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당연히 재야·시민 사회의 목소리가 당분간 커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조성되었다. 다만, 강기갑 의원을 필두로 한 민주노동당은 ‘촛불집회’ 정국에서 앞서가면서 당 지지도가 두자릿수를 기록해 고무된 분위기다.

한때 쇄신에 미온적이었던 여권은 재·보선에서 참패한 이후 ‘대폭 쇄신, 쇠고기 재협상’으로 흐름이 모아지는 분위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민심을 수습할 수 없다는 여론이 내부에서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최근 사설 가운데 일부를 꼽아보면 제목이 이렇다.

‘한나라당의 참패는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다’ ‘정부는 여기서 또 잘못하면 모두 물러날 각오해야’ ‘문책 인사 넘어서서 새판을 짜라’ ‘무역 피해 오더라도 쇠고기 재협상 논의하는 수밖에’. 사설 제목만 보면 한겨레인지 조선일보인지 헷갈린다. 여권의 한 전략가는 이렇게 말했다. “조·중·동이 전면적으로 쇄신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기준에 미달하면 이들부터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사람을 바꾸는 것 자체보다도 누구를 쓰느냐 하는 것이다.” 6월6일 류우익 대통령 비서실장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일괄 사퇴를 표명하면서 ‘대폭 쇄신’의 물꼬가 트였다.

이대통령이 현재의 위기를 넘긴다면 앞으로 정국 주도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집권 초기인 만큼 회복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컨설팅업체 폴컴의 윤경주 사장은 “국정 수행 지지도가 50% 이하로 내려가면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다. 앞으로도 대운하, 교육 자율화, 상수도·의료보험 민영화 문제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촛불 집회가 쇠고기 문제 때문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듯 인적 쇄신도 중요하지만 정책도 쇄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특히 촛불 집회를 계기로 이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하려던 ‘한반도 대운하’는 사실상 어렵게 되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또한 미래를 낙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회심의 카드 두 개가 모두 벽에 부닥침으로써 향후 대통령이 역동적으로 일을 해나가기가 힘든 구조가 만들어졌다. 오히려 이대통령으로서는 당장 살 길을 찾아야 하는 형국에 몰렸다.


“당 대표나 국무총리 맡아 위기의 한나라당 구해야” 주장도

▲ 6월2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게다가 권위가 훼손되고 신뢰에 금이 간 것은 이대통령이 향후 정국을 운영하는 데 상당한 장애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촛불 집회 현장에서 이대통령은 ‘쥐박이’로 불린다. 네티즌들이 생김새를 빗대 붙인 별명이다. 집회 현장에서는 ‘쥐박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구호가 나오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쥐박이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린다. 정부는 졸지에 ‘쥐박이 정부’가 되었다. 가두 행진에서는 ‘이명박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거세게 터져나온다. 여권의 한 전략가는 “신뢰가 있어야 정치적인 난제가 있을 때 국민이 대통령의 말을 들을 것이다. 지금은 신뢰를 잃었다. 대통령이 도덕적 권위가 없다. 취임 전으로 돌아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다시 반추해보아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이런 가운데 여권 내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영남권 인사들을 중심으로 다시 ‘박근혜’를 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야당이 대안으로 떠오르지 못하는 가운데 이대통령이 위기에 처한 만큼 박 전 대표가 앞으로 더욱 주목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치권을 오래 담당해온 한 정부기관 관계자는 “지난 총선 때 입증되었듯이 박 전 대표는 정치적으로 영남에서 이미 대통령이다. 최근 이대통령이 고전하면서 영남에서는 ‘박 전 대표를 뽑았어야 하는데…’ 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정보가 올라오고 있다. 친박 인사들의 복당 문제도 마무리되어 당내에서도 그녀는 확실한 ‘친위대’들을 50명 가까이 거느리게 되었다. 앞으로 박 전 대표는 수도권 유권자들을 겨냥한 행보를 걸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사실 박 전 대표는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한 후 정치적으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이후에는 대통령과 사사건건 갈등했고 지난 총선 때는 아예 지역구에 칩거했다. 그 이후 그녀가 정치적으로 강조한 것은 친박 인사들의 복당 문제였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표는 ‘복당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과거보다 이미지가 손상되었다.

그러나 복당 문제가 매듭지어지면서 박 전 대표는 이미지를 쇄신하는 일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위기가 계속되는 것을 계기로 그녀를 바라보는 당내 시선 또한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벌써부터 한나라당 내에서는 2010년 예정된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박 전 대표의 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당 대표나 국무총리를 맡아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최근 대통령의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당-청 관계가 역전되어 날로 당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입증되었듯이 한나라당의 ‘정치적 주인’은 박 전 대표다. 이런 상태라면 7월 전당대회에 자신이 출마한다면 물론이고 출마하지 않더라도 의외로 빨리 박 전 대표에게 힘이 쏠릴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이대통령으로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분점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몰렸다. ‘촛불’이 여권의 권력 지도를 크게 바꿔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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