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득-정두언 '100일 갈등' 전말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8.06.1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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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을 향한 정두언 의원과 소장파들의 공세가 심상치 않다. 정의원은 의원직 사퇴까지 염두에 두고 ‘형님의 결단’을 요구한다. 대체 이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두언-이상득의 ‘100일 암투’를 추적했다.

촛불’이 여권의 권력 지형을 크게 바꿨다. 지금 여권 내부에서는 힘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여권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미국에 보내 추가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 정국을 어떤 수순으로,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권 내에서조차 ‘대통령만 빼고 다 바꿔!’라는 대폭 쇄신 기조가 우세하다는 것이다. 인적 쇄신은 물론 정책까지, 일대 혁신이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난국을 극복할 수 있을지 자신하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집권 이후 지금까지 이명박 정권의 주류는 ‘이상득계’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었다.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짝을 이룬 박영준 전 기획조정비서관 등 ‘이상득 사람들’이 인사를 주물렀고 그렇게 해서 임명된 이들이 정책을 좌우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사 자체가 실패했고 그런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은 소외되어갔다. 내부 핵심 지지층조차 점점 축소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청와대는 큰 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임기응변식, 프로젝트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한마디로 ‘정치 대통령 이상득’은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쇠고기 협상의 실패도 직·간접적으로 이런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바탕 위에서 터져나온 것이 ‘이상득 퇴진론’이다. 의원직을 사퇴하든지, 국정에 관여하지 말고 순수 국회의원으로만 있겠다는 선언을 하라는 것이 요체다. ‘국정 실패 책임론’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흐름이다.

지난 6월9일 전격적으로 사표를 제출한 박영준 전 기획조정비서관은 이의원의 최측근 인사다. 박 전 비서관의 사퇴는 정두언 의원이 청와대의 류우익 대통령실장, 박영준 비서관, 장다사로 비서관과 이상득 의원을 비판한 내용이 조선일보에 보도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권 내부에서는 정의원이 실제 겨냥한 것은 전면에 있는 박 전 비서관보다 막후에 있는 이의원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정의원 또한 <시사저널>과 만나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17쪽 정두언 의원 인터뷰 참조).

일부 언론은 정의원이 이대통령과 교감을 갖고 일을 벌였다는 맥락으로 보도했으나 그동안의 전개 양상을 볼 때 교감보다는 정의원이 공세를 폈고, 이대통령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정의원이 그동안 여러 차례 대통령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얘기했으나 대통령은 늘 별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이에 더해 ‘김윤옥 역할설’을 전했다. “여론의 흐름을 잘 알고 있는 이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대통령에게 박 전 비서관을 바꾸라고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안다. 이것이 박 전 비서관이 갑자기 경질된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다”라는 것이다. 이대통령은 6월13일 정의원을 비판했다.

정두언-이상득으로 대표되는, 집권 초부터 계속된 여권 내 소장파와 원로파의 갈등은 여권의 쇄신 국면을 맞아 대폭발하고 있다. 이것은 권력 투쟁이자 이명박 정권의 성격과 방향을 둘러싼 노선 투쟁, 어떤 세력이 이명박 정권의 주력군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세력 투쟁이기도 하다. 이대통령이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쇄신의 폭과 깊이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철저하고 완전한 재탄생을 요구하는 소장파의 공세가 거세지만 이에 맞서는 흐름도 일고 있다.

▲ 지난 3월23일 한나라당 소장파 출마자들이 '이상득 불출마'를 촉구하는 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상득 의원이 두 번의 위기에서 살아난 사연

정두언-이상득, 집권 이후 100일간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대선 전에도 ‘이상득’이라는 이름이 한나라당 내에 거론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경기도 이천 땅과 관련해서였고, 한 번은 김경준 사건과 관련해서였다. 2007년 7월 홍사덕 당시 박근혜 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은 ‘이명박 필패론’을 거론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은씨가 이천 땅 10만여 평을 이상득 의원의 아들한테 증여했다. 이것은 진짜 주인이 이부의장이라는 얘기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명박 캠프의 전략가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부분은 “문제가 커진다면 이의원이 사퇴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곡동 땅’이 주목되면서 ‘이천 땅’은 상대적으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갔다.

본선에서는 ‘김경준 사건’이 ‘이상득’을 잡을 뻔했다. 당시 대선 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김경준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캠프에서 국면을 바꾸기 위한 몇 가지 카드를 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재산 헌납 등과 함께 세 번째로 거론했던 것이 ‘이상득 불출마 선언’이었다. 대통령이 그 부분만 빼고 나머지는 받아들였다”라고 전했다.

대선 과정에서는 주로 정두언 의원과 친한 이들이 ‘이상득 불출마’를 거론해서인지 미묘한 흐름이 있기는 했으나 두드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본격화했다. 대선 당시 전국을 돌며 선진국민연대 조직 작업에 전념했던 박영준 전 비서관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비서실 총괄팀장을 맡아 중앙 핵심부로 진입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11년간이나 이의원의 보좌관을 지내 ‘이상득의 복심’으로 통했다. 이때부터 정의원과 이의원을 대리하는 박영준 전 비서관과의 갈등이 싹텄다.

애초 이명박 정부의 인선 작업은 이명박-류우익-정두언-김 아무개 교수가 작업했다. 정의원과 가까운 김교수는 김영삼 정부 때 막후에서 정권의 그랜드 디자인을 그리는 데 참여한 경험이 있어 정무적인 감각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의원은 선진국민연대 인사들의 인수위와 비서실 포진을 요청한 박 전 비서관을 인선 작업 중간에 합류시켰다. 이런 구도는 후반부에 이명박-류우익-박영준 구도로 바뀌었다.

정의원은 기자에게 “인수위 막판에 청와대 비서실 인선 작업을 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서 당 실무자들과 보좌진을 잘 아는 박 전 비서관과 류우익 실장이 마무리를 맡았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당 사람들과 보좌진들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박 전 비서관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정의원이 대통령을 꿈꾸면서 자기 야심 때문에 사람을 심는다”라는 보고가 대통령에게 올라가면서 정의원은 인선 작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인수위에 포진한 인사 중에 정의원과 가까운 인사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정의원이 호남 사람들을 챙긴다는 말도 나돌았다. 정의원이 인선 작업에서 빠지면서 3배수 인선 자료를 넘겼지만 실제로 반영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이후 인사 작업은 ‘박영준팀’에서 인선과 검증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러면서 박 전 비서관이 조직한 선진국민연대 출신들이 대거 청와대에 포진했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선진국민연대와 관계되어 청와대 행정관급으로 포진한 인사만 2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부처에서 파견된 인사들을 뺀 순수 정무직 개념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인사들 가운데 이 정도 세력을 갖고 있는 단체는 없다.

▲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 부부가 지난 4월22일 청와대 만찬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이대통령은 평소 형인 이의원을 무척 따른다. ⓒ연합뉴스
정두언 의원,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이상득 압박하려 했다가 무산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강부자’ 내각· ‘고소영’ 청와대가 이루어질 때 정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잇달아 터져나오는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의 땅 투기 의혹을 비롯한 각종 추문은 소장파들을 끓게 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55인은 총선 직전 급기야 ‘이상득 불출마’를 요구했다. 개혁 공천이 무산되고 문제 많은 인사들이 정권 핵심부에 포진한 막후에 그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의원도 이때 서명했다.

55인 선언이 있기 직전 정의원은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려고 했었다. ‘대선 때 네거티브 공격을 한 사람’ ‘개혁 공천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 등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런 이들은 불출마해야 한다는 내용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이상득 불출마’를 이끌어내려는 노림수였다. 그러나 그와 절친한 한 교수가 대통령께 이 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대통령이 청와대로 그를 불러 “가만히 있어라”라고 말렸다. 이 자리에서 정의원은 자신이 생각하는 각종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했으나 이대통령은 ‘그게 아니고~’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정의원은 계속 문제 제기를 할 수가 없었다.

정의원은 직접 포항에 내려가 이의원을 만나 불출마를 권유하려고 했었다. 내려가려는 찰나에 이재오 전 의원이 전화를 걸어와 “내가 총대를 메겠다”라고 했다. 이날 밤 11시에 이 전 의원과 정의원, 진수희·차명진 의원 등이 서대문에 있는 한 호텔에 모여 ‘이재오·이상득 불출마’를 논의했다. 이것은 다음 날 ‘55인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의원이 출마를 고집하고 이재오 전 의원이 대통령과 만난 뒤 불출마 의사를 접으면서 정의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들의 ‘거사’는 실패했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당시 대통령이 불출마와 관련해 이상득 의원에게 전화했으나 이의원이 ‘무소속으로라도 나간다’고 강하게 버틴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총선 이후 이의원과 정의원은 만나 화해를 도모하기도 했으나 본질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풀지는 못했다. 5월 들어 정의원은 이대통령과도 만났으나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정의원은 “대통령 리더십은 ‘알았어’ 리더십이다. 말할 때마다 다르다”라며 답답해했다.

5월에는 정가에 ‘정두언 사정설’이 돌았다. 정의원의 부인이 운영하는 화랑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는 것이 소문의 핵심이었다. 일각에서는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했다’라고 기정사실화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은 아니었지만 정의원측은 박 전 비서관측에서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최근에는 화해하려는 기류도 있었다. 박 전 비서관은 정의원에게 “오해가 있다. 잘 지내자”라는 취지의 전화를 했다. 기업인을 만나 정의원측 사람을 잘 챙겨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잘못된 인사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정의원의 공세는 아직 진행 중이다. 단단히 결기를 곧추세웠다. 그와 가까운 한 핵심 인사는 “2단계 카드는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장파들은 인적 쇄신과 관련해 이의원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본다. 한 소장파 인사는 “일단 ‘정종복 민정수석 카드’는 꺾었다”라고 말했다. 정의원을 비롯한 여권 소장파들은 이대통령의 쇄신안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의원직 사퇴’를 걸고 집단적으로 반발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민심이 심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소장파 인사는 “이의원에게 줄 대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의원은 사람이 좋아 거절하지를 못한다. 대통령이 형으로부터 독립해야 길이 열린다. 형이 결단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두언-이상득, 100일 전투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와 있다. 중도로 분류되는 나경원 의원 등이 ‘이상득 퇴진론’에 가세한 반면, 이의원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제 ‘萬事兄通’(모든 일은 형을 통한다)이라는 말이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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