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있어도 뜨는 ‘시민 노무현’
  • 송진영 (국제신문 정치부 기자) ()
  • 승인 2008.06.1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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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60대 촌로’로 변신, 가는 곳마다 ‘환대’ / 현실 정치 개입하지 않는 한 인기 지속될 듯

발가락 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동네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들더니 동네 상점에 앉아 담배를 피워댄다. 장화를 신고 인근 하천 청소를 벌이고 야산에서는 널부러진 나뭇가지를 무릎으로 부순 뒤 마대에 담는다. 맞벌이에 나선 아들 내외를 위해 특수 제작한 수레에 손녀를 태운 채 자전거를 탄 그의 얼굴에는 그저 평범한 시민의 웃음만 가득하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을 그는 고향에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퇴임 이후 낙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00일 만에 이렇게 완벽한 60대 촌로가 되었다. 서울에서 바닥쳤던 그의 인기는 고향에서, 대통령이 아닌 시민이 되고 나서야 되살아났다.


지난 2월25일 오랜 역경 끝에 임기를 마무리하고 퇴임하는 순간 노 전 대통령에 대해 격려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는 많지 않았다. 5년 내내 우리 사회는 ‘모두 노무현 탓’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주류 사회는 아웃사이더 출신의 첫 대통령에다 특유의 직설적 화법을 보여준 그를 철저히 ‘왕따’시켰다.

“노무현 탓” 비아냥, “나와주세요” 아우성으로 바뀌어

임기 내내 곤경에 처했던 그가 퇴임 이후 낙향하는 첫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정치권과 주류 사회는 저의를 의심했고 정치적 함의 찾기에 몰두했다. 국민들 역시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날 서울에 기거할 곳이 없어 청와대에 머물러야 했던 그에게 동정심만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1백20명 정도가 사는 경남의 한 시골인 봉하마을에서 ‘노무현’은 다시 태어났다. 국민은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전직 대통령의 평범한 고향 생활을 보기 위한 호기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봉하마을로 달려왔다. 그들의 손에 자녀들도 이끌려 왔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비아냥은 “대통령님, 나와 주세요”라는 아우성으로 바뀌어갔다.

소주·담배·슬리퍼·밀짚모자·장화로 대표되는 그의 고향 봉하마을은 경호상의 문제로 동네 출입조차 경찰에 봉쇄당하고 있는 다른 전직 대통령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봉하마을에서 그에 대한 시민들의 예우는 오히려 청와대 시절보다 낫다. 그가 고향에서 ‘시민 노무현’으로 자리 잡자 임기 내내 불편한 관계를 형성해온 세력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봉하마을에서 만난 송호섭(57·부산 부산진구)씨는 “참여정부 내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었지만 퇴임 이후 선입견 없이 노 전 대통령을 만나니 ‘옛날이 그립다’라는 생각도 생긴다. 돌이켜보면 그가 ‘없는 사람’을 위해 ‘있는 사람’들과 싸웠던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노무현은 국민 90%를 선택했지만, 이명박은 국민 10%를 선택했다. 노무현은 미국이니까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이명박은 미국이니까 믿으라고 했다. 노무현은 부시를 운전했지만, 이명박은 부시가 탄 카트를 운전했다. 노무현은 꿈에서라도 한 번 보고 싶지만, 이명박은 꿈에 볼까 두렵다.”

▲ 식목일날 나무를 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왼쪽). 노사모 정기 총회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 ⓒ연합뉴스
인터넷에 떠도는 ‘노무현과 이명박’이라는 글의 일부지만 봉하마을에 쏠린 민심을 읽기에는 충분하다.
국민은 ‘시민’으로 돌아온 그를 환대했고 여기에 이명박 정부의 잇단 실정은 연착륙에 성공한 ‘시민 노무현’을 또다시 주목하게 만들었다. 부산상고(현 개성고)를 졸업하고 사법 시험에 합격한 뒤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던 그를 청와대로 보내준 인터넷 공간에서 노 전 대통령은 ‘노간지’라는 별칭을 얻으며 소중한 존재가 되기도 했다.

한사코 현실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 아래 그는 퇴임 이후 100일 동안 어떠한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노 전 대통령은 ‘시민’으로서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낙향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를 ‘시민’으로 놔둘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아무리 부정해도 그의 주변에는 복잡한 정치적 동인(動因)들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 오리농법과 매실 재배 등 고향을 위해 살아가려는 그에게 참혹하고 암담한 현실 정치는 ‘시민 노무현’ 대신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두드리며 뭔가를 부단히 요구하고 있다.

답답한 정치 현실이 ‘전직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갈망 낳아

앞서 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경남 김해 을 선거구에서 치러진 4·9 총선과 6·4 재·보궐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것에 대해 지역 정가는 ‘노풍’의 진가가 발휘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가 봉하마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정치’가 된 것이다.

여기에다 노 전 대통령에게 ‘한 말씀’을 듣기 위해 던지는 관광객들의 질문도, 이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응답도, 무응답도 모두 정치적으로 ‘포장’된다.

강경태 신라대 교수(국제관계학)는 “노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퇴임 이후 낙향한 것이다. 기득권의 산물인 정치 세계에서 퇴장한 뒤 본래 근거지,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정치의 최고 정점에 있었던 대통령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여기에 답답한 정치현실은 고향으로 돌아온 ‘시민 노무현’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전직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갈망으로 표출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구축하고 있다.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이 웹사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공식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과 연계해 운영될 전망이다. 또, 기념사업을 위한 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친노 세력의 정치적 부활이 시작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주)봉화’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해 봉하마을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한 관광 사업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가 전남 광양시 매실농원을 방문해 항아리에 담겨진 매실을 맛보고 있다(오른쪽). 봉하마을에 문을 연 '노사모 자원봉사센터'(왼쪽). ⓒ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은 또 지난 6월8일 봉하마을에서 관광객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미국도 우리를 두려워한다. 촛불집회가 거둔 성과는 미국이 성의를 보이려고 대한민국 국민의 심기를 살피고 있다는 점이다”라며 현 시국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대의가 담긴 정치 펼치는 ‘제2의 카터’ 되어야” 주장도

이에 앞서 그는 지난 6월7일 노사모 정기총회에서 “원칙적 관점에서 쇠고기 협상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정권 퇴진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헌정 질서에 맞지 않고 민주주의 질서 속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퇴임 이후 사실상 현실 정치에 대한 첫 ‘논평’을 한 바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노 전 대통령이 정치 현장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이 정치 현장에 뛰어들었을 때 ‘시민 노무현’의 인기가 그대로 이어질 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대세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한 민심이 ‘시민 노무현’ 대신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찾고 있지만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 돌아가는 순간, 노무현 신드롬은 그저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노 전 대통령의 한 측근도 “대통령께서는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변 인사들의 경우 재직 시절과 마찬가지로 자율적 판단에 맡길 뿐 ‘행동 통일’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퇴임 이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훈수를 두던 전직 대통령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이들의 정치 활동을 크게 제약해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낙향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다가왔다. 여기에 그가 퇴임한 뒤 100일 동안 청와대도 국회도 아닌 봉하마을에 쏠린 민심에서 읽을 수 있듯 ‘시민’으로 성공한 그는 전직 대통령의 전범이 될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물론 지금처럼 ‘정치인 노무현’이 아닌 ‘시민 노무현’으로 남아있는 것이 그 전제 조건이다.

안철현 경성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최고의 지위에서 국정을 운영한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것인데 우리 사회는 그러한 경험의 공유를 억압해왔다. 절대 권력이 낳은 정치 불신이 퇴임 이후 전직 대통령들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왔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개인의 영달과 측근의 안위를 챙기는 이른바 ‘사욕이 담긴 정치’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에 매진하는 ‘대의가 담긴 정치’를 펼치는 제2의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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