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노동자를 존중한다, 슬로 패션
  • 이미영 (여성환경연대 운영위원) ()
  • 승인 2008.07.0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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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올 한 올 수작업으로 ‘천천히’
ⓒ헤어 트레이드 코리아 제공
오늘날 속도는 경쟁력을 의미하고 의류 산업도 예외일 수는 없다. 최근 의류 산업의 다크호스로 등장한 패스트 패션은 이러한 의류 산업의 최근 경향을 가장 잘 표현한다. 디자인에서 판매까지 단 1주일, 싼 가격에 매일매일 최신 유행을 반영해 만든 패스트 패션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 덕분에 중·저가의 신규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에 뒤질세라 기존의 고급 의류 브랜드들도 패스트 패션 상표를 앞 다투어 출시하고 있다.

패스트 패션의 전략은 한마디로 ‘많이 벌어서 많이 팔자’는 것인데 이는 디자인에서 최종 소비까지 드는 짧은 시간과 싼 가격 덕분에 가능해진 이야기다.

그러나 패스트 패션의 성공 신화 뒤에는 심각한 윤리 문제와 환경 문제가 감추어져 있다. 때로는 한 잔의 커피 값에 불과한 패스트 패션의 놀라운 가격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 그중에서도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력 착취로 이루어진다. 아시아의 가난한 여성들이 생산하는 옷들은 세계 의류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싼 임금을 찾아다니는 다국적 의류 공장에서 매일 12시간 넘게 일하지만 임금은 최종 소비자 가격의 1~2%에 불과하다. 의료보험이나 보육 혜택은 기대할 수도 없고 작업장에는 환기 시설조차 없다. 이에 외국에서는 더 낮은 임금을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의 반윤리적 행위를 알리고 노동자를 착취해 만들어진 옷을 입지 말자는 ‘깨끗한 옷 입기’ 캠페인이 활발하다.

인권 문제와 더불어 패스트 패션은 환경 오염의 주범으로도 주목받는다. 패스트 패션은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한 해만 지나도 장롱 속 애물단지가 되기 쉽고 한 벌 살 돈으로 여러 벌 사 입을 수 있는 싼 가격은 쉽게 사서 쉽게 버리는 소비 심리를 부채질해 더 많은 쓰레기를 양산한다. 또한 패스트 패션은 대부분 가격이 저렴한 화학섬유 소재를 이용하게 되는데, 썩지 않는 쓰레기인 화학섬유는 소각장에서 태워 없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각 과정에서 배출되는 맹독성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의 인체 위험성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패스트 패션을 환경의 적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원단 생산 과정의 반환경성이다. 화학섬유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투입되는 이산화질소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보다 무려 3백10배나 강한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싼 임금을 찾아 가난한 나라로 이전해 그곳의 낮은 환경 기준을 틈타 독성 폐수를 방류해 지역의 생태계를 초토화시킨 다국적 의류 기업의 반윤리적 행각도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다국적 의류기업이 폐수 방류해 생태계 망쳐

지난해에 발표된 <잘 입는가?>라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보고서에서는 패스트 패션을 쓰레기를 양산하는 ‘환경의 적’이라 규정하고 티셔츠와 스웨터 값이 어떤 경우 샌드위치보다 더 싸게 판매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패스트 패션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이 패스트 푸드 못지않게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여성복 판매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4년간 21% 늘어난 반면, 영국인이 한 해 동안 버린 옷은 1인당 평균 30㎏에 달한다. 반면 자선 기관이나 재활용 가게에 보내지는 옷은 그해 판매된 옷의 8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대부분이 내구 연한 이전에 버려진다고 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헤어 트레이드 코리아 제공

인권 문제,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패스트 패션의 대안으로 실천되고 있는 것이 슬로 패션이다. 패스트 패션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현실과 다르게 느린 속도로 환경과 노동자를 존중해 만들어진 옷을 입자는 슬로족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속도를 단지 양적인 시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질과 가치, 삶의 자세와 관련된 문제로 본다.

슬로 패션을 추구하는 이들은 상표 뒤에 감추어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천연 소재를 사용하거나 재활용해 자연을 배려한 옷, 생산 과정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한 옷을 좀더 비용을 들여 구매하고, 그 대신 적게 사서 오래 입는다면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라는 선물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훌륭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슬로 패션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공정 무역 옷이다. 공정 무역 옷은 자연 소재를 이용해 한 올, 한 올 수작업으로 ‘슬로’하게 만들어진다. 옷을 만든 생산자에게는 공정한 대가가 돌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옷들은 생산자의 이야기와 함께 그 옷의 가치를 아는 소비자, 속도보다는 질과 양심을 추구하는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직거래 무역인 공정 무역의 역사는 60년이 넘어가지만 공정 무역 시장에 옷이 등장한 것은 20년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성장 속도는 놀랍다. 영국의 공정 무역 의류업체인 피플트리에서는 유기농으로 재배한 면화를 면화 소농 생산자로부터 공정한 대가를 주고 구매한 후, 장인들의 손을 거쳐 실을 짓고 베틀로 직조해 만든 옷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장인들에게도 공정한 대가가 돌아감은 물론이다. 소비자들에게는 안전하고 건강하며 매력적인 좋은 품질의 옷과 함께 제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과 생산자 이력, 윤리적 소비에 대한 정보도 제공된다.

한국에서도 시민단체와 양심적인 개인이 모여 공정 무역 주식회사를 설립해 공정하게 거래된 슬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전문 매장 ‘그루’도 열었다. 이 공정 무역 가게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슬로 패션과 공정 무역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슬로 패션은 옷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공정 무역 옷은 생산자와 소비자, 자연 모두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방식으로 양과 속도보다는 가치와 질이 더 중시되는 슬로 패션이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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