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선배’ 제물로 ‘명랑 사회’ 구현?
  • 하재근 (문화평론가) ()
  • 승인 2008.07.15 16: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MBC <명랑히어로> 출연한 이경규, 후배들에게 ‘수모’…정치 풍자하듯 ‘선배 퇴출’ 연출도


이경규가 MBC <명랑히어로>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다. 후배들이 연일 선배인 이경규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씹어댄다’. 이경규는 별다른 반격도 하지 못하고 후배들 눈치만 보는 형국이다. 포문은 김구라가 열었다. 이경규가 <명랑히어로>에 처음 출연한 날, 김구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경규가) 세상 일에 관심이 많으시죠. 일례로 지난번 대통령 선거전에 이명박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신….”

이후로 이경규는 이명박 정부의 대변인격이 되어버렸다. 웬만큼 잘하는 정부도 시사 프로그램에서 칭찬받는 일은 없다. 일처리를 잘 하는 것은 뉴스가 안 되고 못 하는 것들만 화젯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취임 100일 만에 기록적인 지지율 하락을 기록한 정부로서, 이경규가 <명랑히어로>에 출연했을 당시는 여론이 극히 안 좋았을 때였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정부 대변인이 <명랑히어로>처럼 ‘뒷담화’하는 자리에서 좋은 말은 못 듣는 판인데 이명박 정부의 대변인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명랑히어로>의 주 시청자층은 젊은 네티즌들이다. 네티즌 민심은 현 정부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다. 그러므로 이경규는 <명랑히어로>에 처음 등장하자마자 빼도 박도 못하게 악역을 뒤집어쓴 셈이다.

이후 출연자들이 이경규를 질타하거나 조소하고, 이경규는 다른 출연자들이 시원시원하게 말할 때 얼버무리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식으로 눙치는 설정이 굳어졌다. 여기에 세대 차이까지 겹쳤다. 젊은 네티즌들이 얘기하는 자리에 상황 파악 못하는 ‘아저씨’가 엉거주춤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이대통령 지지 경력’으로 고난당하는 설정

당연히 네티즌과 매체의 비판이 잇따랐다. 비판 정도는 양반이고 하차를 거론하는 여론도 강력했다. <명랑히어로>는 이경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이대통령을 지지한 것도 문제이고, 또 어느 쪽 의견이든 상관없으니 소신을 말하면 좋을 텐데 왜 후배들 눈치를 보느냐는 지적이다.

이경규가 누군가? 저 유명한 ‘규 라인’의 수장이다. 스타 MC 군단의 맏형격이며, 오늘날 예능 패권 천하를 일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이며, ‘양심 냉장고’로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살아 있는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정치권으로 치면 김대중·김영삼·김종필과 동급인 인물이다. <명랑히어로> 출연진은 그 무게감으로 보아 정치권으로 치면 386 정도 된다. 중진 실세는 유재석·강호동 등인데 그들은 <명랑히어로>에 출연하지 않는다. 유재석·강호동이 이경규를 ‘갈궈도’ 놀랄 일인데 그렇지도 않은 예능인들 눈치에 이경규가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정치판에서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군대로 치면 일병이 병장에게 “병장님 말입니다. 행동 그렇게 하셔서 되겠습니까? 잘하십쇼” 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장이 일병에게 화를 안 내고 그 눈치를 본다. 3김씨가 후배들 눈치를 보며 “어이, 좀 잘 봐줘” 하고 꼬리를 내리는 광경인데 통쾌하지 않을 수 없다.

포문을 연 김구라를 주말 버라이어티의 한복판에 ‘꽂아준’ 사람도 이경규 자신이다. 3김씨의 마르지 않는 권력의 원천은 공천권 등 ‘정치계 인사권’이었다.

옛날에 과거시험 급제자와 시험관은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라 하여 엄격한 위계를 형성했었다. 동양은 그런 사회다. 뽑아준 사람이 하늘인 것이다. 이경규는 김구라를 비롯한 후배 개그맨들에게 좌주(座主)격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후배 눈치를 본다. 이보다 전복적인 설정은 없다.

이것이 단지 허물어져가는 이경규를 보며 시청자들이 즐길 수 있는 ‘건수’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이경규가 <명랑히어로>에서 후배들에게 당하는 수모는 이경규에게는 약이다. 진부하며 심지어 보수적이기까지 한 이미지로 쇠락해가던 차였다. 후배들한테 당하며 쩔쩔 매는 모습으로 오히려 이경규는 호감을 얻었다.

김구라가 산화하며 이경규 도우미 역할을 한 셈이다. 급기야 <명랑히어로> 15회에서 김구라는 이경규를 프로그램에 계속 출연시켜야 하느냐 퇴출시켜야 하느냐를 주제로 한 토론을 제의하기까지 했다. 김구라의 제의가 받아들여져서 후배들이 저 유명한 규 라인의 수장을 놓고 ‘퇴출시켜? 말어?’ 토론하는 광경까지 연출되었다.

김구라의 흥행 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부장님 없는 자리에서 대리들이 부장님 ‘뒷담화’를 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는데, 이런 설정은 모든 국민의 관심사다. 관심도, 화제도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웃으면서 당해주는 부장이 인기 있는 부장이다. 이런 자리조차 생길 수 없게끔 관리에 철저한 부장은 인기를 얻을 수 없다. 김구라가 이경규를 ‘좋은 형’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경규, 김구라의 괴롭힘 끝에 ‘급호감’ 반전

예능 프로그램의 주 시청자층은 젊은 네티즌들이어서 이명박 대통령 지지 경력은 치명타일 수 있다. 방송에서 이 부분이 속 시원히 거론되지 않으면 인터넷 댓글로 퍼지면서 예능인인 이경규의 이미지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었을 것이다. 김구라가 터뜨리고 그것 때문에 이경규가 고난(?)을 당하는 설정이 이어지며 이경규는 오히려 호감을 얻었다.

이경규의 수모는 프로그램에도 이익이다. 이경규가 쩔쩔 매며 김구라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재밌다. 그것은 시청률로 이어질 것이다. 최소한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많은 네티즌과 매체가 이 대립에 관심을 표명했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예능 프로그램으로서는 이익을 본 셈이다.

이경규가 진정한 수혜자다. 김구라는 악역을 떠맡았다. 김구라가 제의한 이경규 퇴출 토론(?)에서도 김구라는 7 대 1로 졌다. 박미선은 김구라의 의견에 찬성하는 듯하더니, 이경규가 김구라에게 너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안 되었다며 김구라에게 비수를 꽂았다.

김구라는 “나만 이상해졌어”라며 꼬리를 내렸다. 김구라 한 명 바보(?) 되고 모두들 즐기는 토론이 되었다. 이경규에 이어 김구라도 ‘급호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구라가 악역이 되어 프로그램과 이경규를 살린 것이다.

토론은 사회자 역할을 맡은 한 출연자가 ‘이경규씨는 다음 주부터 고정 출연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누가 누구의 고정 출연을 결정한단 말인가? 이경규가 그 사회자 역할의 출연자를 고정 출연으로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김구라가 그런 설정을 이끌어냈다.

이경규에게 호감을, 김구라에게도 호감을, 프로그램에는 재미를 주는 이벤트였다. 이런 설정에 정말로 진지하게 몰입하는 네티즌들이 있다. 비난 글을 올린다. 심지어는 매체도 진지한 기사를 내보낸다. ‘오버’다. 유쾌·상쾌·통쾌한 이벤트다. 보고 좋아하면 그뿐이다. 나에게는 호감만 남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