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함정에 빠진 중국, ‘주판’ 괜히 만들었나
  •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8.07.2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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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부터 고도의 수학 발전시키다 산수에 그치며 ‘자가당착’…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가 결정적 낙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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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인 기원전 1세기의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구장산술(九章算術)>이라는 수학 책에는 놀랍게도 이미 원의 부채꼴 부분의 면적을 구하는 법칙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때 우리 머리를 싸매게 했던 연립방정식을 비롯해 제곱근과 세제곱근, 분수의 4칙 계산, 플러스와 마이너스 개념 그리고 복잡한 비례식 등 모두 2백46개에 이르는 수학 문제가 문제와 해답 그리고 그에 대한 풀이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방정식(方程式)’ ‘기하학(幾何學)’ ‘분모(分母)’ ‘평방(平方)’ ‘입방(立方)’등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수학 용어 중에서 상당수가 서양으로부터 전해온 말이 아니라 이미 중국에서 고대부터 사용되던 용어들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배열한다’라는 ‘방(方)’의식이 곧 ‘정(程)’이었고, 이들을 비교하여 계산한다는 뜻으로부터 ‘방정식’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또 “얼마일까?” 혹은 “몇 명이 필요할까?” 등의 질문은 모두 ‘기하(幾何)’로 표현되어 이로부터 ‘기하학’이라는 용어가 탄생되었다. 2세기에 중국에서 저술된 천문 수학서<주비산경>이라는 책에는 놀랍게도 “직각 삼각형의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면적은 두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2개의 정사각형 면적의 합과 같다”라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을 다루고 있다.

원주율 π를 구하는 문제만 해도 중국이 서양보다 무려 1천년 이상이나 앞서 있었고, 마이너스 개념에서는 중국이 서양에 무려 1천7백년이나앞섰다. 서양인들은 16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고차 방정식에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또한 13세기에 살았던 중국 수학자 주세걸(朱世傑)이 지은<사원옥감(四元玉鑑)>에는 이미 14차 방정식의 해법까지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당나라 시기의 대학이었던 국자감에서는 수학을 공식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어려운 수학책은 바로 조충지라는 수학자가 지은<철술(綴術)>로 학생들이 이 책을 공부하는 데만 꼬박 4년이 걸려야 했다.

그렇다면 이토록 수준이 높던 중국의 수학이 현대에 이르러 왜 서양에 형편없이 뒤지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중국인들이 지나치게 실용성 위주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1천년 동안에 걸쳐 중국의 수학계를 지배해왔던 <구장산술>에 소개된 높은 수준의 수학 문제도 항상 대규모 치수(治水) 공사와 토목 공사를 담당해야 했던 중국 지배층 관료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들이다. 본래 중국의 수학은 이론을 추구했다기보다도 실용적인 적용을 우선시하는 대수적(代數的)인 특성을 보이면서 발전했다.

치수와 토목 공사 위해 수학 발전시켜

한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자. 이를테면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주판을 발명해 그 뛰어난 계산 능력과 실용주의적 효용성을 마음껏 향유해왔다. 그러나 주판의 그 편리한 실용성이 정작 중국인에게는 수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효율성이 뛰어난 주판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편의성에 빠져 오히려 다른 고급대수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주판은 십진수의 배열에 국한되어 있어 장기적으로는 도리어 수학의 근본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수학은 오직 ‘수를 셈 하는’, 문자 그대로 ‘산수(算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은 오직 ‘눈앞의’ 실용주의만을 추구하다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용주의 그리고 가장 큰 실용주의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자와 컴퍼스를 이용한 작도(作圖)로수학을 연구했다. 이러한 장기적 과정을 통해 비록 산술의 분야에 있어서는 동양이 분명하게 앞서게 되었지만, 반면에 기하의 분야에서는 서양이 월등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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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플라톤이 건립한 아카데미의 출입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라”라는 유명한 경고문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이후 서양에서 수학은 17세기에 데카르트가 x축과 y축의 좌표 축 개념을 도입해 포물선 등의 기하학적 도형을 이끌어낸 데서부터 고급 대수학의 싹을 틔우며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기하학을 토대로 해 물리학을 비롯한 현대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석 기하학 토대로 물리학 발전시킨 서양과 대조

이러한 동서양 수학의 역사적 경험은 실용주의의 아이러니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비단 수학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단지 목전의 ‘실용주의’라는 단기적인 이익과 목표 실현에만 몰두할 경우, 결국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발전과 혁신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서양이 중국보다 앞서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근대 사상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천부인권설을 비롯해 사회계약설과 삼권분립 사상은 중세 서구 사회를 질곡화했던 중세적 세계관으로서의 종교 중심적 사고와 절대주의 시대의 왕권신수설을 극복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정립함으로써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근대적인 사회 및 국가 조직을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토대와 사회 구조 위에서 비로소 서구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는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기에 걸쳐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군주 1인의 천하 체제가 강력하게 유지되면서 오직 인간들을 통치와 지배 대상으로만 간주해왔다. 따라서 개인들의 창의력이 발현되기 어려웠고, 결국 사회전체가 건강하고 활력 있게 조직되지 못한 채 도리어 억압되면서 갈수록 정체 내지 퇴보하는 현상을 낳았다. 특히 이러한 중국 사회의 약점은 대부분의 역사 과정에서 지나치게 실용주의만을 추구해온 중국의 특성과 결합되어 사회의 역동적 에너지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결국 총체적으로 시대에 낙후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중국에서는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관료주의에 의해 창조성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근대 과학이 성장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서구는 합리성에 토대를 둔 자유롭고 열린 토론과 소통을 통해 근대 과학을 화려하게 개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실용주의의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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